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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례포럼 후기] 성폭력 공포사회, 함께 넘어서기 위해서

공감이 하는 일/공익법 교육·중개

by 비회원 2012.11.13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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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 나는 중학생 때 남자 선배로부터 함께 노래방에 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어둡고 격리된 공간에 단둘이 있다는 것이 어떤 성적 행동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거부하고 말았다. 나는 수치심을 느꼈고 그 남성은 불쾌했을 것이다. 이후에도 나는 줄곧 성폭력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두운 거리를 혼자 걸을 때, 택시를 탈 때, 엘리베이터 안에 낯선 이와 둘이 있을 때, 지하철에서 불쾌한 시선을 느낄 때, 아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서도. 불안한 나는 내 옷차림을 조심하고 늦기 전에 귀가하며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남성들에게 ‘만만해’ 보이지 않으려는 나름의 노력을 하곤 한다.

 

성폭력 공포사회의 각본과 등장인물

 

지난 10월 23일, 한국성폭력상담소 김두나 활동가와 함께한 10월 월례포럼 <성폭력 범죄, 처벌만이 답인가?>에서는 이처럼 개인을 억압하고 관계를 억압하는,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불안과 공포의 출처와 해결책을 물었다. 강연자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성폭력 사건 발생 건수는 비슷했지만, 언론 보도는 1999년의 880건에서 2012년의 2,790건으로 약 3~4배 상승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각 언론사가 경쟁적으로 사건의 지나치게 세세한 부분까지 보도하면서 우리는 포르노물에 버금갈 정도로 생생한 범죄 서사에 노출되어 있다. 지난 8월의 ‘나주 성폭력 사건’ 같은 경우에도 피해 아동이 자고 있던 집의 구조, 끌려간 길, 몸의 어디가 얼마나 파열되었는지 등이 보는 사람이 끔찍한 기분이 들 정도의 내용이 기사에 모두 드러나 있다.

 

이런 집중보도와 더불어 특히 아동과 청소년,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의 처벌이 강화되었다. 성충동억제약물로 가해 남성의 성욕을 묶고, 전자발찌로 몸을 묶고, 신상정보공개 및 직업제한으로 사회적 삶을 묶어두는 이런 정책들은 과연 우리를 더 안전하게 하는 것일까? 성폭력 공포에 떠는 여론을 진정시키려는 법과 정책들은 마치 우리에게, 저 일탈적 성범죄자들을 ‘선량한’ 시민들로부터 격리시키면 우리는 안전해진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 안에도 성범죄자는 언제나 존재해왔고 존재할 것이며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실제로 신상공개를 통해 내 옆집, 앞집에 사는 혹은 나와 매일 함께 일해야 하는 성범죄자의 존재를 알게 되면 공포에 떨고 이사를 하거나 피해 다니는 것 이외에 또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지는 누구도 답하고 있지 않다.

 

성폭력 사건에 대한 이야기들과 정책 대안들을 접하면서 나는 “가해자” 또는 “피해자”라는 등장인물 명칭들 뒤에 존재하는 ‘보통 사람’으로서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떠올리지 못했었다. 너무나 취약하고 불쌍하고 보호해 주어야만 하는 여성 피해자와 그와는 대조적으로 너무나 강하고 무섭고 괴물 같은 남성 가해자가 대립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어느샌가 그려 놓고 있었다. 하지만 강연을 들으면서,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는 이런 명확한 성별적 각본이야말로 성폭력을 저질러도 되는 환경을 만들며 성폭력 이후의 공동체적인 해결로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쌍하고 ‘피해자다운’ 피해자

 

공포스러운 성폭력 각본 속 피해자는 언제나 약하고, 괴로워하고, 연애도 못할 것이며, 일생을 피해 경험에 사로잡혀 살 것이라는 것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피해자다움’의 관념이다. 물론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이런 괴로움을 겪는다. 하지만 피해자라는 이름으로만 획일화될 수 없는 개인들의 삶이 그/녀들에게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애써 그것을 보려 하지 않는다. 뉴스 속의 ‘불쌍한’ 피해자에게는 지지와 응원을 보내지만, 정작 내 가족이나 내 이웃 혹은 나의 며느리가 피해자라면 반응이 달라진다. 한동안 이슈가 되었던 ‘나영이 사건’의 피해 아동에게는 후원이 이어지고 여론은 공분으로 들끓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성애 관계의 여성이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을 때 남자는 ‘이해해 주는’ 경우가 드물다. 심지어 지난 2009년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부설 쉼터를 이관하려 할 때, 상담소는 해당 지역 주민들의 ‘혐오시설 입주 반대’ 민원에 직면해야 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이중의 관념은, 당사자들로 하여금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피해를 경험하게 한다. 아동이나 장애인처럼 명백하게 취약하거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저항한 경우와 같이 특정한 피해자에 해당하지 않는 피해자는 ‘진짜’ 피해자가 아니라는 의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성경험이 있는 비장애 성인여성이나, 성매매 경력이 있는 여성은 소위 꽃뱀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고 스스로 결백을 증명해야 한다. 이렇게 “보호받아야 하는 섹슈얼리티는 따로 있다”는 생각은, 작년 고려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에서 가해자 중 한 명이 “피해자가 평소에 문란했는지?”를 묻는 설문지를 돌렸던 것과 같은 극단적 형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악한 ‘괴물’ 가해자

 

 

 

 

성폭력 사건이라 하면 일상의 다양한 장면들 대신 유명한 사건 이름이 떠오르는 것처럼, 언론은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성폭력, 성추행, 성희롱 사건을 동등하게 보도하지 않는다. 선별되고 보도되는 사건들 속의 가해자들은 대게 소위 ‘사이코패스’이거나, 저소득층이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경우가 많다.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인 것처럼, 내 주변에 없거나 있더라도 가까이 안 지낼 것 같은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비정상적’ 범죄자들을 다룬 인터넷 기사에서 쉽게 “죽여라”는 분노에 찬 댓글을 달고는 한다. 정부가 형량 강화나 신상정보공개, 직업제한과 같이 성범죄자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을 채택하고 이런 방안이 지지받는 이유도 ‘그들’만 없으면 우리 사회는 깨끗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강경한 태도가, 정작 내 주변인이 또는 의외로 ‘보통’ 사람이 가해자일 때는 뒤바뀌곤 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지원했던 사례 중에서는 국민참여재판에서 TV에서 보던 사람과는 달리 너무나 ‘멀쩡한’ 성폭력 피고인에 대해 배심원들이 무죄를 선고한 경우가 있었다. 그 외에도 집행유예가 선고되는 경우가 전체 기소된 성폭력 사건의 35%에 달하는 등, 법에 정해진 처벌이 실제로 적용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도무지 가해자 같지가 않은, 한 가정의 가장이고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가해자일 때는 온정주의가 발동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낯선 사이코패스에 의한 가해보다 아는 사람, 가까운 사람에 의한 가해가 훨씬 많은데도, 괴물과 같은 전형적인 가해자 상을 설정하는 것은 보다 일상적인 장면에서의 성폭력에 있어서는 손쉽게 가해자를 두둔하거나 피해자의 입을 막는 효과를 가져 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위하여

 

우리를 옥죄고 있는 성폭력 각본에서 조금의 거리를 두고 등장인물들이 사실은 나와 내 주변 사람을 포함한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성폭력 공포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조금은 새로운 접근이 가능하다. 성폭력은 결코 특수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심각한 인권 침해를 저질러도 되게 하는, 그리고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사회적인 역할구조와 위계에 허용적인 문화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개개인을 악마화하고 처벌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책임을 가지고 이런 문화를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

 

성범죄자 신상정보 공개는 집값이 떨어뜨렸던 것 이외에 사회의 안전수준에는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고 강연자는 말했다. 단지 가해자 그리고 함께 살고있는 가족을 공동체 내에서 고립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국보다 더 자세하게 신상을 공개하고 직업을 제한하는 국가에서 그런 성범죄자들은 결국 살 곳이 없어 다리 밑에서 자는 홈리스가 되고 또다른 사회적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을 배척하며 “저런 괴물은 모조리 없애버리자!”고 말하는 수많은 대중이 있는데도, 여전히 일상적인 성폭력을 겪고 있는 많은 피해당사자들은 신고조차 두려워하고 있다. 분명히 범죄의 피해자인 그/녀들이 사회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거주시설조차 ‘혐오시설’이 되는 이 불편한 진실을 우리는 마주해야 한다. 이 생각들을 바꿔내지 않으면 누군가의 일상에서는 또 다른 성폭력이 발생할 것이고 잠재적 피해자는 침묵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라고 해도 평생 주어진 피해자 정체성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사회를 살아간다. 아무리 가해자가 괴물 같아 보여도, 그/녀들은 언젠가 사회로 복귀할 것이며 ‘우리’를 구성한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당장은 조금 고통스럽더라도, 모두가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살기 위해서는 함께 이 난제를 넘어야 한다.

 

글_ 홍인(16기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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