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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인권법 캠프 후기] 우리는 무르익음을 필요로 한다_류은숙님 강연을 듣고.. - 김현경

공감이 하는 일/공감 인권법 캠프

by 비회원 2012.08.16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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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지만

 

“류은숙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창립 멤버이자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입십니다. 인권운동을 하며 얻은 수입은 인권활동을 위해서만 쓴다는 원칙에 따라, 생계는 식당 아르바이트로 유지하고 계십니다.” 사회자의 강연자 소개멘트를 듣던 그 때도, 후기를 쓰는 지금도 첫 데이트의 설렘만큼 두근거립니다.

 

강연을 듣는 내내 뜨거웠던 체온과 여전히 바쁜 심장 소리를 전할 수 없기 때문일까요? ‘권리의 언어’가 권리를 승자 혹은 패자의 대결로 몰고 간다며 “사회경제적 약자의 사연을 카피라이터가 10초짜리 문구로 담을 수 있는 길이 이상으로 토론하는 것은 기피하는” 세태를 걱정하셨던 강연자님 말씀이, 어쩐지 위로가 됩니다.

 

 

2. 자유롭게 모인 당신들과 함께

 

강연은「권리의 언어를 넘어」를 주제로 약 1시간 30분간 이어졌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우리시대 인권의 고민과 그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죠.

 

강연자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인권이 잘 되려면 ‘헤쳐모여’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헤쳐’란 다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지닌 각 개인이 자기를 발견하고 창조하는 것을, ‘모여’는 고유한 개인이 잘 모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외적 억압으로 고통받는 정체성에 관심을 갖고, 같은 문제에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으로서 모이는 것이 곧 ‘헤쳐모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형태의 모임이 ‘모여’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임 중에는 비인권적인 성격을 지닌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소위 ‘패거리주의’는 연대의 광경이라 할 수 없으며, ‘전체주의’의 경우 그 사회 구성원은 ‘자기’를 갖지 못합니다. ‘모여’란 자유로운 ‘자기’들이 모여서 각자의 개성을 존중받는 모임으로서 강제 · 동원 · 수단적 모임과는 구분된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한편, 한국 사회의 인식은 오랫동안 ‘국민’과 ‘민권’에 머물렀고 ‘인간’은커녕 ‘시민’에도 닿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대학 강의실은 물론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조차 인권의식은 없었다는 말씀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군부정권이 종식(1993)되면서 ‘인권’을 표면에 내건 단체가 등장하고 ‘억눌려 살면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사람들이 인권’에 기대어 점차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스러운 한편, 그러나 외환위기(1997)를 기점으로 삶의 방식이 바뀌고 생존 문제가 과제로 급부상하였다는 점과 자기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점이 안타까웠습니다.

 

인권과 인권운동의 역사를 듣는 시간은, 제가 얼마나 많은 사람과 세월에 빚지고 살아가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강연자님께서 우리시대 인권의 한 문제점으로 지적하신 “권리 담론이 정치 담론을 먹어 가면서 이기적인 권리 타령(rights talk)이 만연하는” 현실이 더 가슴 아팠습니다. 권리 타령은 ‘권리’라는 단어가 가진 힘과 정당성에 기대어, 온갖 종류의 권리를 인권의 대항논리로 내세우는 것으로, 이랜드 노동자들의 투쟁을 비판하면서 ‘쇼핑할 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거나 장애아동 교육시설 건립에 반대하면서 ‘우리 아이의 교육권을 보장하라’고 주장하는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권이란 오랜 투쟁의 산물이라는 것을 우리 사회가 너무 빨리 잊었다는 점이 안타깝지만, 그저 안타까워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함께 분노하고 바로잡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진정한 인권을 말하며

 

그러면 인권을 이야기할 때는 어떤 방법을 거쳐야 할까요? “인권의 언어로써 인권의 화법을 통하여”야 합니다. ‘인권의 언어’란 타인에 대한 환대와 공동체에 대한 헌신, 그리고 깊은 성찰과 논쟁을 요구하는 정치적 언어를 말합니다. 모든 권리는 상호의존적이고, 따라서 자신이 주장하는 권리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권의 언어를 대결주의적이고 양자택일적인 ‘권리의 언어’와 구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인권의 화법’은 “내가 바로 전태일이다”, “내가 바로 김진숙이다”처럼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는 선언으로 완성된다고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이 아니지만”이라고 말하는 순간 인권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나는 너와 같은 입장에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이해해.” 하는 식으로 말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거리두기와 부정어 뒤에는 동정적인 말이 올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듣고, 그간 간접화법을 즐겨 썼던 것을 깊이 반성하였습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는 선언, 즉 ‘연대의 화법’이 곧 인권의 화법입니다. 구경꾼에 머물지 말고, 서로가 서로에게 격려가 되자는 것이지요.

 

권리 타령과 인권을 달리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이 둘을 분명하게 구별하기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민하던 찰나, 강연자님께서 ‘인권의 트라이앵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삼각형 모양의 어느 한 쪽이라도 없거나 틀어지면 트라이앵글 소리가 나지 않는 것처럼, 인권의 3대 원칙인 자유, 평등, 연대 중 하나라도 빠뜨리거나 소홀히 한다면 인권의 어느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앞으로는 모든 권리투쟁에 인권의 트라이앵글이 들어있는지를 검증하여 인권의 이름을 빌려 권리 타령을 정당화하는 목소리에 속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고, 권리 타령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강연자님께서는 가라타니 고진의 “우정이란 자기가 있는 사람끼리 가능한 관계다.”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유 없는 연대는 동원이요, 위계 있는 관계는 연대일 수 없다. 자기가 있어야 연대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연대’라는 말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사실 정확한 의미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공감으로부터 추상하는 능력, 악에 대한 공통인식, 차이에 기초한 연대, 고유한 자기 간의 만남, 타인에 대한 상상력, 비대칭적 관계, 타인을 위해 떨쳐 일어섬, 자유의 실천”이라는 ‘연대의 철학’은 생소하지만 유익했습니다. “만날 가능성도 없는 타인과의 연대도 상상하라”는, 그것이 바로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말씀에서 연대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인권의 트라이앵글을 가지고, 인권의 언어를 인권의 화법에 실어, 인권을 말하고 맥락을 잃지 않는 “무르익음”을 추구해야겠습니다.

 

 

4. 풀어가고 싶습니다!

 

강연자님께서는 “사람 만나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라”고 강조하며 강연을 마무리하셨습니다. 그것이 내게 이익으로 돌아오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시간 낭비인지 생산적인 만남인지를 따지는 것은 “자본주의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시간 관리법입니다. 우리시대 인권의 고민은 ‘연대’로 풀어야 하고, 그 출발은 모든 만남 안에 ‘서로’를 두는 것입니다.

 

강연을 듣고 나서, 저는 같은 조 친구들과 밤늦도록 ‘인권’에 대해 대화하고 새벽까지 마피아 게임을 즐겼답니다. 캠프가 끝난 지금도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이 또한 ‘연대’라고 믿으면서 말이지요. 독자 여러분과도 좋은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면, 한 데 어울려 즐겁게 연대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글_김현경(여름 인권법 캠프 참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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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17 07:51 신고
    강의 들을 당시의 부끄러움과 감동이 되살아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과 세월에 빚지고 살아가는가' 하는 말에 심히 공감하고요. 시간 관리법과 상관 없이, 다시 우리가 마음으로 모이고 얘기 나눌 날이 빨리 오길 바랍니다.
    그나저나 나 카카오톡 오류 생겨서 채팅방에서 튕겨진(?) 것 맞는 것 같아요. 대화를 볼 수가 없어...ㅠㅠ
    다시 초대해 줘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