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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권리" - 윤지영 변호사와 함께한 <노동인권> 세미나 후기

공감이 하는 일/공익법 교육·중개

by 비회원 2012. 3. 23.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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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길한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 없다.

촉탁근무동의서...

“근무 중 불의의 사고 및 본인의 지병으로 인하여 사망하게 되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본인의 귀책사유를 불문, 어떠한 불이익 처분도 감수하겠으며, 촉탁근무신청에 동의합니다”

여기에 서명을 해야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면 난 아마 쌍욕을 퍼붓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아직 살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난 그래도 저런 곳까지 기웃거리며 생계를 구걸하며 살 일은 없겠지. 참 다행이야’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고된 불안에 눈 한번 질끈 감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불쌍한 사람 어디 한둘이야’하며 무덤덤해지려 해도 자꾸 뒷맛이 씁쓸하다. 그 유쾌하지 못한 씁쓸함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 이 글은 바로 그러한 ‘공감’에 대한 글이다.


촉탁근무동의서가 눈 한번 질끈 감고 싸인 한번 휘갈기면 그 뿐일, 한낱 서류에 그쳤으면 좋았겠지만, 어느 한 아주머니에게만큼은 그러질 못했다. 비가 오던 어느 날, 상습적으로 침수하는 아파트 지하실에서 물을 퍼내다 결국 감전사하고 말았다. 대치동 은마아파트. 저마다의 자식들이 '그래도 저런 곳까지 기웃거리며 생계를 구걸하는 삶'을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교육의 대향연이 펼쳐지는 그곳에, 보이지 않는 다른 삶도 있었다.


아파트 벽 곳곳에는 침수 시 지체 없이 지하실의 물을 퍼내라는 아주머니의 근무요령이 붙어있었다. 한 사람을 수시로 사지로 몰아가는 그 글귀의 잔인함. 지하 그리고 지상의 공간, 그 글귀만큼의 단단한 분리. 생각나는 것들은 많았지만 씁쓸함을 마주하려 드니 분노부터 치밀었다. 촉탁근무동의서에는 아주머니의 남편과 자식의 날인도 필요했다. 일자리를 구하면서 가족 몰래 참담한 서약을 해야 했던 아주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제 그 효용을 다할 날이 되어 주검과 함께 촉탁근무동의서를 받아 든 남편과 자식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와중에 책임을 회피하고자 그 참담한 종이 한 장을 유가족에게 전해 준 사업주의 얼굴은 어떤 표정이었을까?

 
# 빌어먹을 권리

 
지상의 사람들은 권리를 행사하며 살아가고, 지하의 사람들은 권리를 빌어먹는다.

촉탁근무 동의서의 내용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직관적인 정의감정에 철저히 반한다. 굳이 법적으로 더 따져볼 것도 없이 무효인 문서들이 노동시장에 횡행하는 이유, 도대체 그 저의가 무엇일까? 어차피 당해야만 한다면, 이유나 알고 당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너무도 당연한 권리들을 노골적으로 외면한 근로계약 등의 형식문서들. 그것들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 당당히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윤지영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작성해 놓으면, 근로자의 귀책사유 없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도 정말로 어떠한 이의도 제기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이다. 아주머니 역시 48년 8월 18일생, 법 없이만 살아오신 만 62세의 나이였다.

너무도 당연한 권리들을 부정한 처분문서들은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 내가 가진 권리들을 순식간에 ‘전리품’으로 바꾸어 버리기 때문이다. 권리를 보장받으려는 자는 마치 자신에게 없었던 무언가를 남으로부터 얻어내듯 안간힘을 써야하고, 상대편은 마치 아무런 의무도 없는데 인심쓰듯 최소한의 권리만을 내어주려고 한다. 이렇게 근로자가 긴 시간을 들여 때로는 구걸하고 때로는 싸워가며 가까스로 힘들게 얻어내는 바로 그 '권리'는, 애초에 그들에게 당연히 주어진 것인데도 말이다. 

법은 곧 "누구에게나 그래야만 하는 당위"라고 들었다.  우리 사회는 당위를 현실에 반영할 의지를 얼마만큼 갖추고 있는가? 법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호구 잡기 위한 저런 시도들을 언제까지 목도해야 하는가? 모든 안 좋은 것에는 비겁한 방관자가 존재한다.

 
# 싼 맛에 쓴다

 
이것들 말고도 또 있을 수 있을까? 용역·하청업체 직원, 간접고용, 사내 하도급, 불법파견, 특수고용, 개인 사업자 등등. 사람이 사람을 싸게 써먹을 수 있도록 우리가 새롭게 고안해 낸 고용형태들이다.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는 이 나라의 경제 질서는 인건비 절감 이외의 별다른 창의를 알지 못한다.


위기 때마다 꺼내 드는 카드는 언제나 인건비 절감이다. 사실 창의라고 말하기에도 뭣하다. 전자제품 상가에 가서 노트북을 집어들고 노트라고 부르며, 500원에 사서 쓰는 꼴이니, 우리는 이러한 사태를 두고 결코 ‘창의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차라리 날강도라고 부르지. 생판 다른 것인 양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버리고, 이름을 달리 짓는다 하여 변하지 않는 그 실질이 가려질 수 없다.

 
파렴치한 날강도 짓을 정당화하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법 개념들이 미처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많이도 생겨났다. 별반 다르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구태여 차이를 찾아 새롭게 규율하려는 시도라서 그런지, 세미나 내용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일정한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가 현상에 대한 이해를 돕지 못하고 자꾸 의문만 남긴다는 것은, 그러한 시도 자체가 애초에 무리수였다는 뜻이 아닐까?


한 사람의 삶을 비용의 논리로 접근하여 “니들이 일하는 건 쫌 다르게 일하는 거야. 그래서 남들보다 당연히 못 받는 거고!”라고 명명해 버리는 일방적인 시각의 폭력성. 오늘도 그렇게 지상과 지하는 자꾸만 분리되어 간다.

 

# 당신은 얼마나 독보적이십니까?

 

노동관련 분야를 법이 특별히 따로 다루는 이유는 ‘사용종속성’에 있다고 흔히들 말한다. 사용자의 지휘감독 하에 종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무기대등하게 부여해 주고 동등한 위치에서 싸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나는 그 ‘종속’을 ‘대체가능한’이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그래야만 그 서글픔이 정확하게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힘에 굴종하여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대부분 그 조직의 시스템 하에서 ‘대체가능한 자원’들일 뿐이다. 제 아무리 잘나봐야 시스템이 이미 구축되어 있는 한, 사람 몇 명 바뀌었다고 해서 달라질 것 없는 구조. 그래서 아쉬울 것 없는 강자인 회사에 맞서 뭉쳐서 협상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노동 관련 법제의 특별한 이념이라 나는 감각한다.

 
당신은 자기분야에서 얼마나 독보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차후에라도 자기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모두 비슷한 비극에 처해 있다. 처참함의 정도가 다를지 몰라도 서로서로 비슷한 정서 속에 일하며 살아간다. 나는 도대체 언제까지 계량 가능한 생산력으로 취급되어야 하는가? 인건비라는 명목하에 함부로 계량되고, 쉽게 절감되는 현실 속에 내 이름은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여전히 아직 ‘살만한’ 사람인가? 애써 눈 감았던 불편함, 왠지 모를 언짢음, 유쾌하지 않은 씁쓸함, 이 모든 것들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 지금, 이 땅에 도저히 대체될 수 없는 당신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우리들을 향한 우리들의 공감이 필요하다.

 


글_ 황호경(15기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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