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런 법이 있습니다.
(사진 출처 _ 한국일보)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거나 헌법 개정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고 감옥에 가야하는 법이 있습니다. 이 법을 비판하는 것도 죄가 되어 감옥에 가야합니다. 이 법에 위반되면 영장 없이도 체포·구속이 되고 법원이 아닌 군법회의에서 심판합니다.
# 어두웠던 유신헌법의 역사
# 법리공방의 연속, 참고인 진술
변호인의 변론이 끝나고 위의 문제와 관련해 몇가지 질문을 한 후에 참고인의 진술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 날의 변론은 변호인들보다는 참고인들에게 법리적인 구성과 관련해 질문하는 데에 시간을 거의 보냈습니다. 덕분에 싱겁게 끝날 줄 알았던 변론이 법학을 공부한 저로서도 어렵고 잘 이해가 안가는 법리공방이 3시간에 걸쳐 계속 이어졌습니다.
첫 번째 참고인인 김선택 교수는 긴급조치는 내용상 위헌성이 명백하다고 말했습니다. 더불어 유신헌법 제53조도 유신헌법 자체가 헌법개정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절차위반의 문제가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이전과 이후의 헌법과 완전히 다른 이질적인 헌법이며 그 중에서도 헌법 제53조는 특히나 문제가 많은 규정이어서 현행헌법을 토대로 한 위헌판단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실정법의 정의에 대한 모순이 참을 수 없이 명백한 경우는 그 법은 부인되어야한다는 라드부르흐의 공식 혹은 기존헌법의 핵심원리를 심사기준으로 삼는 방법 등으로 위헌판단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진술이 끝난 후 재판관들의 법리와 관련된 수많은 질문이 이어졌는데 재판관들이 특히 유신헌법 제53조를 각하하지 않고 본안 판단하는 것에 대해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김선택 교수는 “87년 민주화시위로 만들어진 현행헌법의 최대 업적 중 하나인 헌법재판소가 헌법적 쿠데타의 아픈 역사를 그대로 바라만 보고 있어서는 안된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미래의 대한민국에 이런 일이 다시는 벌어질 수 없게 하기 위해서 이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예외를 인정해서라도 꼭 위헌으로 판단을 해달라”며 간곡히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실효되어버린 법을 헌법소원으로 기존 판례를 변경해서라도 어떻게든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선언을 받으려는 이유와 이 심판이 헌정사에서 지니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참고인인 김진섭 변호사는 대법원이 위헌판결을 한 이상 각 피해자별로 법원을 통해 구제받으면 될 것이라며 권리보호이익이 없고 법적안정성의 측면에서도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헌법재판관 중 한 분이 대법원의 판단은 구체적사건에 대해서만 효력이 있고 각급법원이 대법원의 의견에 법적으로 구속되는 것은 아니니, 긴급조치로 처벌받은 사람들의 재심재판을 개시하려면 위헌선언이 필요한 것은 아니냐며 반박 하자 시간이 없어서 준비가 부족했다며 빠르게 의견진술을 끝냈습니다.
세 번째 참고인인 정태호 교수는 유신헌법 제53조는 1차적으로 유신헌법에, 2차적으로는 현행헌법에 배치되므로 위헌결정이 되어야 하고 긴급조치들 역시 법원이 아닌 헌법재판소에 판단권한이 있다고 의견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앞서의 김선택 교수와 같이 법리에 대한 여러 질문들이 오고간 후 마지막으로 이강국 헌법재판소장이 헌법재판소가 긴급조치에 대한 관할권을 가짐에도 대법원이 이미 위헌선언을 해버린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정태호 교수도 대법원이 국회의 입법형성관여를 기준으로 삼아 긴급조치를 위헌 선언한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헌법재판소에 관할권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강국 헌법재판소소장이 그렇다면 대법원이 헌법이 정한 관할권을 위반하여 결국은 헌법위반이 된 것이 아니냐며 그러면 헌법재판관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물었습니다.
정태호 교수는 대법원이 긴급조치를 위헌 선언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지만 어쨌든 이 긴급조치의 위헌성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하면서 헌법재판소가 감정적으로 나설 것은 아니고 대법원이 내린 기왕의 판결에 대해서 관할권 위반을 이유로 취소를 하는 것과 같은 대응은 자제하고 차분하게 이 사건의 법리를 잘 구성하여 헌법재판소 역시 본안판단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에서 그동안 교과서에서 학설과 판례로만 만나던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관할권 다툼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어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그러나 유신헌법 제53조를 위헌 선언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조심스러워하던 헌법재판관들이 관할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반짝이는 것이 조금 씁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참고인 진술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이석태 변호사는 대법원이 전원의 만장일치로 위헌판결을 한 것은 유신헌법이 사법부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 이론을 떠나서 어떻게든 심판을 해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생각된다고 말했습니다. 더불어 변호인들의 이론적 구성이 조금 부족한 것도 사실이고 헌법재판소의 기존 판례태도에 따르면 헌법재판소가 판단을 하는 것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규범의 위헌성을 심사하는 최고기관인 헌법재판소가 사법부를 완전히 부정하는 유신헌법 제53조 대해서 위헌선언을 하지 않는 것은 자기모순이라면서 이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꼭 위헌선언을 내려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 교과서와는 달랐던 현실 속 헌법
그렇게 장장 3시간 30분에 걸친 변론이 끝나고 저는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청구인과 변호인은 물론이고 참고인과 방청객 그리고 정부, 심지어 헌법재판관들 본인조차도 유신헌법 제53조와 긴급조치가 위헌적인 악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논의를 거쳐 간곡히 위헌선언을 해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머리로는 헌법교과서에서 배웠던 학설과 판례가 떠올라 헌법재판관들이 하는 고민이 이해가 되었지만 결국 법이 규범으로서 가지는 정당성은 정의에 부합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고 법리란 그것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기 위한 것에 불과함에도 오히려 그 법리에 의해 악법을 악법이라 부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현실이 답답했습니다. 그 날 많은 분들이 희망하신 것처럼 법리구성도 물론 중요하지만 헌법재판관들이 헌법재판소는 헌법질서의 수호기관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악법은 악법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해봅니다.
글_강성대(공감 14기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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