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들리지 않습니다. 크게 말해 주세요.”
얼마 전, 공감에 하나의 승소 소식이 전해졌다. 청각장애를 이유로 대학 측에서 차별을 받다 결국 재임용이 거부되고,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안태성 전 청강문화산업대학(이하 청강대) 교수에게 무죄가 선고된 것이다. 그동안 그가 장애인으로서 겪었던 차별과 지난했던 투쟁 과정을 직접 들어보고자 안태성 씨의 작업실을 찾았다. 우연찮게도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하 장차법) 시행으로부터 정확히 3년이 되는 날이었다.
안태성 씨와 그의 전 투쟁과정을 함께 해왔던 “동지”인 부인 이재순 씨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인사말을 몇 마디 나누는 와중에 평소와 다름없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취재팀에 대해 안태성 씨가 잘 안 들린다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장애차별에 관해서 인터뷰하러 왔다면서 다시 차별을 반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스스로 조금 부끄러워졌던 순간이었다.
안태성 씨는 한쪽 귀는 전혀 들리지 않고 다른 쪽 귀는 보청기의 도움을 받고 있는 청각 장애인이다. 보청기를 사용하더라도 큰 목소리로 얘기해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안태성 씨의 이러한 장애에 대해 지금까지 사회에서는 수많은 직접적․간접적 차별을 가해왔다. 아무 생각 없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넨 취재팀의 행동도 그러한 차별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되도록 크게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미리 보낸 질문지를 참고하여 본격적인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안태성 씨는 인터뷰 과정에서 예전 일을 다 잊어버렸다면서 그동안 받았던 상처를 다시 드러내어 되새기는 것을 꺼려했다. 이재순 씨는 남편을 걱정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장애차별 문제를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며 안태성 씨가 받았던 차별과 그에 맞선 투쟁 이야기를 보충해 주었다.
“학생 시절, 수업을 들을 때 교수가 뭐라고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안태성 씨가 장애인임을 이유로 청강대에서 지속적인 차별을 당했다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대학사회에 겪은 차별이 주목을 받게 되었지만, 그 전에도 장애에 대한 몰이해, 편견으로부터 비롯된 여러 형태의 차별이 있어 왔다. 30여 년 전 공장에서 일할 때는 장애에 대한 편견이 지금보다 더 깊어 청각장애 사실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했는데, 선배가 부르는 데도 대답이 없다는 이유 등으로 ‘왜 맞는지도 모른 채’ 폭행을 당해야 했다고 한다.
어렵게 늦깎이로 미술대학에 재학하던 당시에는 자신의 장애 사실을 교수들이나 학교 측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장애에 합당한 편의제공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안태성 씨는 “4년 동안 한 번도 교수가 뭐라고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며 그 당시를 기억했다. 강의가 끝난 후 주변 학생들에게 다시 물어보기는 했지만, 단편적이고 결과적인 정보만 건네 들을 수 밖에 없어 “친구들이 그림 작업하거나 레포트 쓰거나 하면 한번 씩 꼭 봐야 되었다”며 강의 듣기가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토로했다.
“최소한 대학사회에서는 정말 차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관련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후, 안태성 씨는 1999년 청강대의 애니메이션과 전임강사로 임용되게 된다. 2001년 만화전공을 독립시켜 만화창작과 초대 학과장이 되고 만화창작과 조교수로 승진되는 등 청강대 생활은 겉보기에는 순탄한 듯이 보였다. 이재순 씨는 “최소한 대학사회에서는 정말 차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1년 대학 내 한 세미나에서 보청기를 갈아 끼우면서 청각장애 사실이 많은 교수들에게 드러나자 노골적인 차별이 시작되었다.
안태성 씨는 학교 수업의 경우 학생들에게 자신의 청각장애 사실을 말하고, 크게 말하거나 이메일로 추가 질문을 해 줄 것을 부탁하여 무리 없이 진행하여 나갔다. 그러나 학교 측은 이미 안태성 씨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에 대한 고려 없이 단독으로 고등학교에 대학홍보 나갈 것이라든지 자동차 면허를 따야 한다든지 하며 안태성 씨에게 부당한 요구를 가했다고 한다. 학생들과 수학여행을 가거나 졸업사진을 찍을 때도 공지를 받지 못해 학생들을 통해 뒤늦게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학교 측은 오히려 학과 회의나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며 안태성 씨에게 친화력이 부족하다고 몰아세웠다고 한다. 전 직원이 참여하는 해외연수에는 학교 측의 직접적 요구로 참석하지 못하기도 했으며, 귀가 먹었으니 학교를 나가라는 폭언까지 들어야 했다고 한다. 안태성 씨는 재직 당시의 이야기를 꺼내자 표정이 어두워지며 입을 다물었고, 이재순 씨가 '암흑기'였다며 '화가 치미는' 그 시절을 대신 증언해주었다.
교원 지위도 계속적으로 강임되었다. 안태성 씨는 조교수로 승진했지만 학교 측의 요구로 정년이 보장 되지 않는 계약제 전임교원으로 재계약하고, 계약 기간 와중에 당시 아무런 근거가 없던 강의전담교원으로 계약을 변경하게 되었다. 청강대 재직 시에는 계속된 학교 측의 부당 대우에도 불구하고 “인화단결(친화)을 잘 한다면 원직 복귀를 해준다는 약속을 믿고 학교 측의 요구에 따르려고 노력했다”고 안태성 씨는 말했다.
“개인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고 더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존 계약이 만료 즈음에 학교 측이 자신에게만 인화단결 조건을 부가하며 다시 1년이라는 단기의 강의전담교원으로 재계약을 원하자 안태성 씨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학교 측의 부당한 계약조건 요구로 결국 재임용은 결렬되고 안태성 씨는 “거대한 힘에 죽고 싶지 않아” 학교 측의 장애인 차별 실태를 적극적으로 알리며 전임교원으로의 재임용을 요구하는 4년여에 걸친 다윗의 골리앗을 향한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에는 개인의 소송으로 시작했지만 차츰 개인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고 더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먼저 청강대 교문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안태성 씨는 “스승의 날에 학생들이 몰려나와서 노래를 불러주고 꽃도 달아주었다”며 앞뒤에서 지지해주는 학생들 덕분에 힘이 났다고 한다. 안태성 씨의 연작의 주제이기도 한, 슬픔과 소외를 상징하는 삐에로 복장을 하고 시위를 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 측으로부터는 임용 시에 이력서나 면접에서 청각 장애인을 왜 표시하지 않았냐며 도리어 폭언을 들어야 했다.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에 장애인 차별을 이유로 진정도 했다. 2008년 인권위는 “청각장애인으로서 그 특성에 대한 이해를 받지 못한 채 동료 교수들이나 학교 당국으로부터 비우호적 대우를 받았을 것으로 판단”된다며 학교 측에 장애인차별 관련 특별 인권교육을 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학교 측은 지금까지도 단지 ‘권고’일 뿐이라는 이유로 인권위의 결정을 무시하고 있다.
학교 측의 부당한 계약조건 요구, 즉 실질적 재임용거부에 대해서는 교원소청심사위원회(이하 ‘교원소청위)와 법원을 왔다갔다 하며 끈질기게 다퉜다. 민사소송으로 해직무효확인소송도 제기하고 손해배상청구소송도 제기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소송조차 안태성 씨에게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청각장애를 이유로 차별했음을 들어 그에 대한 권리 구제를 원하는 것이었지만, 소송 과정에서도 안태성 씨의 청각장애를 고려하지 않아 소송당사자를 실질적으로 배제하는 사태가 계속적으로 행해졌다. 2007년 한 변론에서는 판사가 안태성 씨에게 질문을 하는데 안태성 씨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어 부당하게 몰리게 되자, 방청석에서 지켜보던 이재순 씨가 너무 화가 나서 “이 사람은 청각장애라서 못 듣는다”고 큰 소리로 항의하기도 했다.
- 글 : 이종희
- 정리 : 이수정, 여동근 (13기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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