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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부른 희망을 팔아 지면을 채우며 - 강곤 기자 인터뷰

공감이 하는 일/자원활동가 이야기

by 비회원 2008. 4. 1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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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하나]

섣부른 희망을 팔아 지면을 채우며

 

강곤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기자)

 

여자가 사기꾼 남자에게 어떻게 사기를 치는 지 알려달라고 하자 남자는 여자를 버스터미널 옆에 있는 환전소로 데려갑니다. 거기에는 휴가 나온 해병대 젊은이가 막차시간을 앞두고 초조해하며 집에서 보내올 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자는 젊은이에게 다가가서 자신도 해병대 출신이라며 말을 건넵니다. 우리 부부는 여행 중에 그만 지갑을 잃어버려 친구에게 급전을 부탁했노라 거짓말을 합니다. 또 막차시간이 다 되어가니 우리 돈이 먼저 오면 차비를 빌려주겠노라고, 나중에 계좌로 부쳐주면 되니 부담가지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남자의 돈이 도착할 리 만무합니다. 곧 송금된 돈을 찾은 젊은이는 머뭇거리다 남자에게 다가와 차비를 빌려주겠다며 계좌번호를 물어옵니다. 남자는 정중히 사양하고는 여자를 데리고 환전소를 나섭니다.


벌써 10년 전쯤에 친구의 자취방에서 재미있게 봤던 ‘위험한 도박(Höüsë Öf Gåmës)'이란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기꾼 남자는 환전소를 나와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을 줘야만 해요.”



인터뷰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는 처음이자 끝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아무리 의견이 맞지 않고 설혹 정반대의 입장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최소한의 신뢰가 서로에게 형성된다면 좋은 인터뷰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관계가 좋고 호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더라도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인터뷰는 불가능하거나 그저 형식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할 때면 내가 사기를 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영화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기행각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고 제법 통쾌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정말 질이 안 좋은 범죄입니다. 사기꾼은 피해자에게 물질적 손해와는 별개로 인간에 대한 씻을 수 없는 배신감을 안겨주기 마련입니다. 피해자가 받은 정신적 충격과 마음의 상처는 그 크기를 젤 수도, 무게를 달수도 없어 그만큼 치유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종종 피해자의 삶을 회복 불가능한 지경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천문학적 피해가 예상되는 태안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심상치 않습니다. 벌써 그곳에서는 온갖 사기꾼들이 모여드는 통에 주민들 간의 이해관계가 극심하게 갈리고 “누구는 보상병에 걸렸다”는 둥, “어디는 누구 편이라더라”는 둥, 온갖 막말과 흑색선전이 난무한다고 합니다. 책임을 짊어져야 할 기관과 가해기업들의 행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가난했을지언정 행복했던 마을 공동체가 시커먼 기름띠가 가져다 준 재앙에 이어 이제는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겁니다. 사건의 원인과 양상만 조금 다를 뿐 정체불명의 개발에 눈이 멀어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핵 폐기장을 유치하려 했던 부안이나 헤아릴 수 없는 뭇 생명들과 어민들의 숨통을 끝내 막아버린 새만금에서 그랬듯이 말입니다. 



다른 곳도 아닌 공기업에서 벌인 취업사기에 맞서 벌써 몇 년째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KTX 여승무원들은 “왜 비정규직으로 취직해놓고 너희들만 정규직을 시켜달라고 하느냐”는 악의적인 언론과 네티즌들의 댓글에 가장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한 번 쫓겨난 것도 모자라 한국정부에 의해, 그것도 두 번이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야 했던 평택 대추리 주민들의 가슴에 대못 질을 한 것도 “더 많은 보상금을 바라고 떼를 쓴다.”는 국방부의 거짓말과 그게 거짓인줄 알면서도 그대로 받아쓴 언론들이었습니다. 인권변호사가 뭔지, 노동부 장관이 누군지도 모르고 살다가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과 장관 탓에 작업장에서 거리로 나와 머리띠를 묶어야 했던 중년의 아주머니들, 이랜드 노동조합원들을 지금 이 순간 가장 힘들게 하는 말도 “외부 세력에 놀아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매도라고 합니다.



꼬박꼬박 세금을 내온 정부와 젊음을 바쳐 일했던 회사에게 느끼는 배신감도 배신감이지만 하루아침에 경찰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시민에서 경찰의 진압대상, 사회 불순세력이 되어버린 자신들의 처지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그런데 경쟁력 있는 강자들로 똘똘 뭉친 이른바 주류사회는 아주 간단하게 이들을 사기꾼으로, 들러리, 꼭두각시,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어떤 이랜드 노동조합원은 가까운 친척이 어느 신문사설을 그대로 베낀 듯이 이야기하는 걸 듣고 아예 설득하기를 단념했다고 털어놓습니다. 또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는 마치 다들 자기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고 다른 나라 말을 쓰는 것 같아 점점 외로울 때가 많다며 우리들은 모두 국적만 한국이지 사실은 이주노동자라고 토로합니다. 그런데 지난여름 만났던, 이주노동자 운동은 이주노동자들만을 위한 게 아니라 한국의 노동자와 한국의 미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의연하게 일러주던 진짜 이주노동자는 이미 강제추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거대한 사기놀음이고 우리는 그 한 가운데 대책 없이 걸려든 것 같아 막막해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시선으로, 지배자의 언어가 아닌 저항하는 사람들의 언어로 기록하기를 멈출 수야 없겠지요. 그것이 이 거대한 사기행각을 드러내고 세상이 좀 더 살만하게 하는데 자그마한 보탬이 된다는 믿음. 믿음은 주고받는 게 아니라 함께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희망이 될 것이라 우기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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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7.15 14:35 신고
    마지막에 이야기하신 그 이랜드 노동조합원 분의 말씀이 걸리는군요. 가까운 친척을 설득할 수 없다면, 자기 자신의 논리나 혹은 자신의 삶에 의문을 가져보는 일도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실은 지금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월급을 백만 원 더 받든 덜 받든 상관 없이 모두 다 외롭고 우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면에서는 똑같은 처지니까요. 주류 대 비주류라는 대립의 선을 긋는 접근 방식이, 그래서 서로를 더 소외시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