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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푸른알약을 쓰고 싶다 - 푸제온 강제실시 청구단체 KANOS(카노스) 대표 강석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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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소송 당사자 이야기]

"한국판 <푸른 알약>을 쓰고 싶다"
- 푸제온 강제실시 청구단체 KANOS(카노스) 대표 강석주 인터뷰



2002년, HIV(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양성 결과 통보를 들었다. 멍했다. 눈물이 왈칵 나거나 감정의 변화가 급격히 일어난다거나 하진 않았다. 대부분의 HIV 감염인들은 결과를 듣는 순간, 머리 속이 멍해지고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그만큼 큰 일이기 때문일 터다. 하던 일을 잠시 쉬었다.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카노스(KANOS)를 알게 됐다. 카노스는 HIV/ADIS 감염인 연대단체다. 직업이 간호사였기에 몇몇 HIV 감염인들을 상담하게 됐다. 간호사였지만 나 역시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던 때다. 에이즈에 걸리면 당장 죽을 줄 알고 수백억 자산을 모두 기부하고선 “나 왜 안 죽느냐”고 묻는 이도 있었다. 조금의 정보만 있다면, 조금의 도움만 있다면 좀 더 살 수 있었을 사람들의 자살 소식도 많았다. 무지로 인한 안타까운 사연들을 접하면서 사람들을 돕다 보니 어느 순간 활동가가 되어 있었다. HIV 감염인이자 현 카노스(HIV/AIDS감염인연대) 대표인 강석주의 이야기다.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나타난다

 
강석주 대표와의 만남은 약속시간에서 1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뤄졌다. 그는 문을 열며 “요즘 너무 바쁘다”고 미안한 맘을 전했다. 요즘 그가 하는 일은 노숙인 지원사업. 노숙인 감염인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상담도 하고, 필요한 절차를 돕는다. 감염인이 국가의 치료지원을 받으려면 주민등록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노숙인 중엔 말소자가 꽤 된다. 빚이 있는 경우도 많아 청산 과정도 돕고, 쪽방이나 쉼터를 알아보는 등 거주지도 마련해 준다.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야 하는 전 과정이 모두 그의 손에서 이뤄진다. 그가 건강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건강한 에이즈 환자라니 의아스러울 수 있지만, 실제로 그는 건강하다. 비감염인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을 똑같이 하고, 생활에 지장 없이 살고 있다. 피로는 퇴근 후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풀고, 운동은 “하고 싶은데 잘 안 하게 된다”며 머리를 긁적이며 웃는다. 에이즈와는 아무 관계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많은 이들이 아직도 에이즈를 원인도 알 수 없고, 약도 없어 걸리면 무조건 죽는 ‘현대판 흑사병’ 정도로 생각하지만, 이는 오해다. 감염경로가 밝혀졌고, 치료약도 30종 넘게 개발됐다. 국내 감염인 1호 박모씨는 25년째 일상생활을 살아가고 있고, 의료계와 전문단체에서도 HIV 감염인의 기대수명을 40년 정도로 보고 있다. 약을 잘 먹고 평소 건강상태를 잘 관리하면 자연사할 때까지 살 수 있는 만성질환이 된 것이다.

 

에이즈라는 질병 그리고 차별이라는 공포

 

그렇다면 언론에서 보게 되는 에이즈 사망자 기사는 뭘까. 강대표는 “너무 늦은 케이스”라며 한숨을 내쉰다. 에이즈에 대한 편견과 공포 때문에 검진을 꺼려해 “본인이 에이즈에 걸렸는지도 모르다가 아파서 쓰러지고 나서야 병원에 오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조기에 치료하면 불러오지 않았을 합병증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다. 그리고 이들 에이즈 환자들을 괴롭게 하는 것은 “병 자체 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고독감과 사회적 낙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친구는 물론 가족에게도 외면당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라, 행여 아는 사람에게 눈에 띄어 소문날까 두려워 감염인들 모임조차 나오지 않는 이도 있다.


강석주 대표는 사람들이 에이즈를 공포스럽게 받아들이는 이유를 “성관계로 감염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꼽았다. 누구나 성인이면 성관계를 하는데도 유교 영향에 따라 성을 금기시해온 까닭이라는 것이다. 감염인을 병을 옮기는 병균마냥 여기는 오해도 한 몫 한다. 감염인들도 성생활을 하는데, 조심만 하면 비감염인과 성생활을 해도 전염되지 않는다. HIV 양성 감염인 부인과의 결혼생활 이야기를 그린 책 <푸른 알약>의 프레드릭 페테르스도 비감염인이고, 강대표와 4년째 함께 살고 있는 이도 마찬가지다.

 

에이즈에 대한 이런 사실들이 잘 알려지지 않다 보니 감염인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다. 언론에 카노스 활동모습이 사진으로라도 나가면 그 날은 마음 아픈 날이 된다. 댓글의 대부분을 채우는 악플들 때문이다. 에이즈에 대한 차별을 없애려면 오해를 풀어야 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언론에 나설 수 밖에 없는데 이는 곧 악플을 통해 세상의 차가운 시선을 오롯이 느끼는 또 다른 계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받는 상처가 너무 커 “차라리 조용히 살자”고 한탄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니까 조금씩이나마 바뀌는 거 아니겠냐”며 지지하는 감염인들의 수가 더 많다. 그만큼 감염인들이 일상에서 부딪치는 편견과 차별의 벽이 높은 까닭이다.

 

 길이 멀고 험해도 함께 가 주는 이들이 있기에


감염인의 인권보장을 위해 일하는 것이 때론 너무 힘들어 울기도 많이 울었다는 강대표. 그래도 작년엔 기쁜 일도 있었다. 특허발명의 강제실시 요건을 완화하는 특허법 개정안이 통과된 것. 여기에는 사연이 길다. 카노스는 공익변호사그룹 공감과 함께 푸제온의 강제실시를 청구했었다. 푸제온은 에이즈 환자들이 마지막에 선택하는 치료제인데, 제약사인 로슈가 너무 높은 가격을 매겨 보건복지부와 가격 협상에 실패, 지난 5년간 국내 환자들이 이용할 수 없었다. 에이즈 환자의 생명을 놓고 로슈가 ‘장삿셈’을 챙기려 한 것이다. 비록 강제실시청구는 기각됐지만, 이후 특허법 개정의 발판이 됐다. 강 대표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라도 통과돼 너무 기뻤다”고 웃었다.

 


그는 강제실시청구를 같이 한 공감의 정정훈 변호사처럼 비감염인들이 자신들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제 일처럼 일하는 걸 보면서 힘을 낸다고 했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자신의 문제인 것처럼 열성적으로 뛰어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연대 덕분에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닐까 한단다. 덧붙여 “나 역시도 그런 사람들 없었으면 이렇게 활동 못했을 거예요” 라고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노숙자 감염인을 지원하는 일 외에도 외국인 감염인 강제출국 문제를 놓고 인권위 진정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하루 하루 바쁘지만, 최근 고민인 것이 또 하나 생겼다. 감염인에 대한 진료거부 사례가 워낙 많아, ‘소송을 하면 거부를 좀 줄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것. 의사들이 외면하면 감염인들이 더욱 숨을 수 밖에 없고, 숨겨서 제때 치료받지 못하면 건강을 해칠 위험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감염인들이 양지로 나올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강 대표는 “질병에 어떤 은유도 씌우지 말고 질병을 질병 그대로 봐달라”고 부탁했다. “질병은 치료를 하면 되는 문제이고, 환자는 범죄자나 낙인자가 아니라 환자일 뿐”이란 말이다.

 

유럽과 미국 등에서 13개 연구진이 하나의 임상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에이즈 감염인 중 조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은 사람이 3년 안에 말기 상태가 되거나 숨질 확률은 3.4%인데 비해, 치료를 받지 못한 이는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는 내용이다. 감염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제때 치료받고 잘 관리하면 평생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이들을 자칫 벼랑으로 내몰 수도 있다. 바쁘게 움직이며 충실히 일하고 다른 이들까지 돕는 강석주 대표처럼 열심히 제 생을 살아가는 많은 감염인들이 존재한다. 힘든 일도 많지만, 씩씩하게 웃으면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보이는 그대로 그들을 바라봐 주는 것이다.

 

 건강한 감염인, 행복한 감염인, 함께 살아가는 감염인


에이즈는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니다. 많은 통계와 연구결과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오해와 편견을 버리면 감염인들이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좋은 사회는 질병의 여부와 관계 없이 누구나 차별 받지 않는 곳일 터. 모두가 어우러질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카노스의 강석주 대표는 오늘도 바삐 움직인다.

 

 

*강제실시: 특허권자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조치로 특허권자 외의 제 3자도 특허발명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 특허남용으로 공공의 이익이 침해되거나 사람이 죽어갈 때 그 폐해를 막기 위한 제도.

 

글_11기 인턴 김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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