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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친구를 만나다 - 공감 9회 인권법 캠프 참가기_이승준

공감이 하는 일/공감 인권법 캠프

by 공감이 2016.02.15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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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뛰는 일을 하라고들 합니다. 아마 부모님 빼고는 다들 그렇게 얘기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두 번쯤 사랑에 실패하고 뭘 뽑는 데서도 몇 번 떨어지고 나면, 더 이상 무언가에 가슴 뛰는 것이 왜 내게만 이렇게 어려운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2016년 1월 20일. 기록적인 한파와 함께 아홉 번째 공감 캠프가 문을 열었습니다. 거기에는 저처럼 가슴 뛰고 싶은 바보 사람부터, 방학을 맞아 무료하던 차에 마침 집도 가까우니 이 어찌 좋지 아니한가 하여 대뜸 신청한 사람까지, 다양한 친구들이 찾아들었습니다. 저마다 다른 참가동기를 말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특별한 삶'을 살고 싶은 열망은 같아 보입니다. 그만큼 이 캠프는 참 특별했어요. 평소 재주가 없어 글을 길게 쓰지 못하는데 오래도록 잊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참 많아서, 꼭 열 가지만 기록해두려고 합니다. 
 
1 –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움직이다
 
10시가 넘으니 참가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다들 두근거린다. 캠프가 열리는 강의장은 꽤 넓은데 사람들이 모이자, 이내 공간은 따뜻해진다. 오전 프로그램은 우리가 친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스톱모션극과 함께 가볍게 시작됐다. 에이 같이 연기한다고 친해지는 건 아니지 싶었는데 친해졌다.
 
조별로 비밀리에 부여받은 인권침해 상황 한 가지를 연기하고 그 의도를 서로 맞추는 게임. 이게 의외로 어렵다. 모독을 당하는 성소수자! 군대 가혹행위! 어떤 장면인지는 막 가볍게들 맞추는데, 화면에 속한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과연 어떤 마음일까를 상상해 보는 일은, 구석진 근육을 처음 쓰는 것처럼 낯선 경험이었다.

 

 

사람을 한 공간에 모아 놓고 바로 내 눈앞에 생생히 있어도 이렇게나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기가 힘든데, TV에서나 가끔 보이는 소외되고 먼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건 얼마나 더 어려운가. 그리고 그 삶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또 얼마나 건방진 일인가.
 
2 – 누구도 차이를 차별하지 않는다. 내가 섞이고 싶지 않은 차이를 차별할 뿐
 
“어디에서 온 누구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밥 먹으랴, 자기소개하랴 미팅 같았던 점심식사를 마치고 사이좋게 이를 닦는다. 말할 때마다 서로 다른 치약 향기를 내며 뽀득거리며 오후 일정을 맞이한다. 보통 미팅 마치고 같이 이를 닦진 않잖아? 뭔가 다르다 이건.

 

물론 오후 일정도 분명히 달랐다. 오전에 이어 인권교육센터 ‘들’ 선생님이 참여마당을 주도했으니 조건은 같다. 달라진 건 ‘시선’이다. 나는 차별을 당하는 쪽보다 차별을 고착화하는데 기여하는 쪽이었음은 인정하지만, 최소한 내가 차별을 행하는 쪽은 아니라고 확신했는데, 확신한 만큼 미안했달까?
 
“인간의 확신은 진실보다 어떤 감각에서 비롯됩니다. 서로 다르다는 믿음도 감각에서 비롯되고요. 그만큼 본능적으로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알죠. 그래서 누구도 차이를 차별하진 않아요. 다만 인간은 내가 섞이고 싶지 않은 차이를 차별합니다. 내가 누구와 섞이고 싶은지 섞여도 괜찮은지 몰라할 때, 권력은 때로 ‘특정한 집단과는 섞여봐야 득 될 것 없다’고 교묘히 조장하죠. 이렇게 선택된 차이에 권위와 권력이 붙고 제도화되면 차별은 비로소 탄생, 가속화됩니다.”
 

 

이 직관적인 통찰을 풀어 놓은 선생님은 한 시간 전부터 연기와 웃음으로 우리를 들었다 놨다 하던 바로 그분이었다. 매우 말랐지만 단단히 서 계셨고 눈빛이 빛났다. 사실 이성으로 무장한 사람은 유머를 겸비하기 어렵다.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 유머러스한 초이성적 인간을 만났을 때 우리는 소위 ‘물건’이라고 할 정도니까. 이게 그러니까 대단히 대단한 거다. 물...아니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치만 존경합니다. 제 맘 아시죠. 
 
3 – 최대 비극은 악인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다
 
공감 캠프는 인권 전반에 관한 공통 주제 이외에 개인적 관심에 맞추어 두 가지 주제를 선택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하니 공감 참 체계적이군요. 엄지 척!) 나는 성소수자 인권을 골랐다. 가장 궁금한 분야였으니까. 오후 4시. 참가자의 절반이 장애인권 분반을 찾아 떠나자 장서연 변호사님의 성소수자 인권 강의가 시작되었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역사, 얽힌 법적 문제, 최신의 쟁점 등 거의 모든 화두를 두 시간 동안 그야말로 숨 가쁘게 스크린 하는 동안, 이상하게도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오전에 있었던 스톱모션극에서 나는 성소수자 커플을 연기했다. 둘이 그냥 팔짱을 끼고 그냥 손을 잡고 그냥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런 역할이었는데, 나는 그때 왜 어딘가 불편한 마음이 들었을까. 연기가 끝나고, 나는 왜 일부러 더 아무렇지 않은 척했을까. 아니 그럼 아무렇다는 건 뭐야? 설마 누군가 나를 정말 동성애자로 보면 어떡하나. 그런 마음 때문이었던 건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한숨이 나온다. 내 한계를 만난 것이다. 그것이 내 수준이었던 거다. 인권감수성이니 뭐니 말하지만 감수성이라면 나만한 사람도 드물지 생각하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성인군자인 척하면서. 멋진 친구인 척하면서. ‘이게 당연한 거지.’ 막 떠들면서. 딱 그 수준으로 살아왔구나. 이 무슨 불현듯 자기반성인가. 
 

 

각자의 상식에서 당연하다 말하는 그 당연함들이 반드시 차별을 만들어 낸다. 누군가는 ‘예쁜 걸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라고 말하기도 하고 ‘강자가 약자보다 더 많이 갖는 건 당연하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게 왜 당연한지를 묻지 않는 그 당연함들. 그것이 당연한지 아닌지를 연구하고 논리를 만들고 설득하고 때로는 당연함의 폭력에 맞서지 않으면, 나 또한 언젠가는 당연함을 강요받는 소수에 속하는 날이 오고야 만다. 이곳 역시 법률가를 필요로 하는 전장이다.
 
이윽고 고개를 들었을 때 장서연 변호사님은 마틴 루터킹을 인용하고 있다.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었다.” 내가 선한 쪽이든 아니든, 그 말을 부인할 수 없었다.
 
4 – 캠프는 아닙니다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두 배는 더 허기진 채로 저녁을 먹으며 생각했다. ‘이게..... 캠프는 아니야. 캠프란 무릇 파이어가 있어야 하고 먹거리와 장기자랑이 끊이지 않아야 하거늘, 이곳에서는 십분이 멀다하고 새로운 고민거리만 주어진다. 온 힘을 다해 그 이야기에 한 걸음 접근하고 나면 반드시 나보다 더 뛰어난 참가자가 두 걸음 앞서 나를 가르친다. 아니 분명 캠프랬잖아? 내 나이 이제 겨우 돌이라도 씹어 먹을 서른셋 이라지만, 두 시간도 안 되어 점심이 소화되다니. 이건 수련회야.’

 

줄줄이 탁견이 오고 가는 장면은 배우는 입장에서 매우 바람직한 환경이지만 동시에, 좀 버겁다. 보통은 힘찬 하루를 시작하며 모닝커피를 하는데 우리 조는 저녁을 먹고 사이좋게 나가 이브닝커피를 한 잔씩 했다. 세상에 오늘 처음 본 사람과 아침부터 스톱모션극을 하고 이도 닦고 밤까지 커피를 마시다니.
 
세상에 더욱 재미난 것은, 이 버겁고 빡쎄고 진귀한 모종의 경험들이 계속 내 가슴을 뛰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약간 상기된 것을 보면 어딘가 이산가족을 만난 것 같다. 신의 탄생을 예고하는 별빛을 보고 서로 다른 방향에서 말구유를 찾아가다 만난 동방박사들은, 어쩌면 그 여정에서 서로를 더 반가워하지 않았을까. 구유야 아직 보질 못했지만. 이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직 모르지만. 사람은 눈에 보이니까.

 

5 – 먹고 살만해요
 
첫날밤. 두 조씩 묶어 공감 구성원과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우리 모둠은 윤지영 변호사님과 함께한다. 드디어. Finally. 올 것이 온 것이다. 꼭 여쭙고 싶은 게 있었다. 솔직히 전업 공익 인권변호사로 활동할 마음이나 이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살아 볼 의욕 같은 걸 물어온다면, 난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난 그 정도의 사람이 못 된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따로 있다. 바로 경제적인 문제. 그래서 어처구니없게도, “생활이 되냐.”고 툭 물었다. 피식. 이었는지. 훗. 이었는지 모를 미소와 함께 주스가 든 잔을 왼손에 들고 긴 머리를 오른쪽 이마로부터 가볍게 쓸어 넘기고는, 그녀가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먹고 살만해요. 정말로. 많이.”
 
분명했다. 말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녀는 밝은 표정과 미소, 그리고 온몸으로 말해왔다. 나는 ‘인권변호는 고난이고 십자가인데 거기서 받는 돈은 광야에서 도시락 하나 사 먹을 돈도 안 되니 힘 빠지지 않느냐.’고 함부로 물은 것인데, 윤 변호사님은 ‘내가 제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매일 가슴 뛰는데, 거기다 돈까지 주니 이만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답한 것이다.

 

그래. 삶에서 행복을 만나는 순서의 문제였구나. 마음이 물리적으로 너무 시원해진다. 이 문제를 풀고 싶어 왔는데, 풀렸으니까. 참가자들의 토론과 게임과 술과 웃음이 새벽까지 오고 간다. 나는 술도 안 마시고 게임도 안 하는데 들떠서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이 숙제가 그간 꽤 무거웠나 보다. 
 
6 – 봄의 대법관, 전수안
 
“안녕하세요~ 전수안이에요~(꺄앍). 안녕하세요~ 전수안입니다~~(꺄앍)”
실제로 꺄앍이라고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꺄앍과 다름없는 상큼한 입장이다. 강의실 뒤편에서 강단까지 걸어 나오시며 연신 인사를 건네신다. 대한민국 법조계의 큰 어른은 살구색의 짧은 재킷 밑단을 만져 보이며 여느 고등학생처럼 “이런 색 옷은 처음 입어봐요~” 라고도 말씀하신다. 봄이 왔나 싶은, 前 대법관 전수안 님이다. 소수의견을 내는 대법관으로 6년, 법조인으로 34년 이상을 지내온 대선배는 과연 ‘법’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실까.
 
“다윈,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이들은 모두 당대의 소수의견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당대의 보편적 지식이란 무엇일까요. 보편적 가치란. 사회 통념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더구나 거기에 근거한 예측이란. 전망이란. 얼마나 틀리기 쉬운 것입니까. 변호사 시장에 대한 우려, 사법시험이니 로스쿨이니 하는 ‘과정’에 대한 걱정. 여러분, 쫄지 마세요. 여자가 법대를? 여자가 판사를? 하던 시절도 있었답니다.”
 
“그보다, 왜 법조인이 되고자 하는지를 고민하세요. 내가 하려는 일은, 법조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인가? 위안부 문제, 세월호 문제. 국민들이 길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는 동안 이 땅의 법률가들은 다 어디에 있었는가? 무엇을 했는가? 그렇다면 나는 또 한 명의 법률가로 추가되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거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것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있을까요. 물어보세요. 이것은 내 영혼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바로 그 일인가요?”
 
“동성애냐 이성애냐 하는 것은 지지하거나 반대할 대상이 아니에요. 이해하거나 몰이해가 있을 뿐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해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르죠. 빨강을 이해한다거나 노랑에 반대한다거나 하는 게, 불가능한 표현인 것처럼.”
 

 

“고립되어 가는 개인을 구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마술 같은 대안은 연대하고, 또 연대하는 것입니다.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더 높이! 이런 올림픽 같은 태도와 공부 방법으로는 좋은 법률가가 될 수 없습니다. 남보다 더 뛰어나 지려고 욕심내기 전에 그 ‘남’을 먼저 보세요. 정말 지식인이라면 남의 일에 참견하세요. 남을 돕겠다는 열정을 구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직역은 바로 변호사입니다. 변호사는 대놓고 편 들 수 있잖아요? 변호사는 남의 버스비를 대신 내주거나 빙판길의 케이크 상자를 대신 들어주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다시 태어나면 판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대로 돌아가면, 난 아마 또 판사가 되었을 거에요. 나는 다시 공부한다면 개별법률보다 헌법과 국제 인권법을 먼저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대로 돌아가면, 난 아마 또 개별법률을 먼저 손에 들었을 겁니다. 나에게는, 그 바른 순서를, 가르쳐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저지른 과오와 오판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내 남은 평생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변호사로 일할 자신도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잘못을 더 하려고요. 내가 여러분에게 이런 조언들을 감히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일생에 몇 번은 가슴 뛰는 사건으로 영혼이 온통 행복해지는 경험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세상에 온 보람 아닐까요. 여러분만큼은, ‘똑똑하지만 그저 유순한 양 떼’로 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잠깐 쉬는 동안 그녀가 피아노에 다가가 여덟 마디를 연주한다. 뒷부분이 기억나질 않아 더는 못 치겠다며 배시시 웃으셨다. 63세의 나이에도 오로지 인간 대 인간의 매력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려는 그 삶의 태도에서 저 위대한 말들보다 더 큰 위안과 감동을 받았다. 거장의 강연 역시 원고를 훔치고 싶을 만큼 보석 같은 말들이 가득했다. 욕심인 줄 알지만 그 느낌, 감동들. 모두 잊히면 어쩌나 싶다. 때문에 그 조각이라도 앞뒤로 이어 붙여 여기에 욕심껏 담아둔다. 
 
7 – 이 사람은 보상받을 수 있을까요? 
 
내가 선택한 두 번째 주제마당은 ‘노동인권’이다. 윤지영 변호사님이 세 가지 주제를 던진다. 아파트 지하실에서 감전사한 청소부 할머니, 주민의 모욕에 자살을 택한 경비원, 위탁 배달 오토바이를 몰던 10대 배달원의 사고. 모든 질문은 ‘이 사람은 보상받을 수 있을까요?’로 끝난다. 발언권을 얻은 이는 자기 의견을 말하고, 변호사님은 쟁점을 덧붙인다. 그리고는 심화 강의를 이어간다.
 
두 시간을 꽉 채운 노동인권 브리핑은 정말로 압도적이었다. 압도적이었다. 압도적이었다. 전문성에 압도된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다. 얼마나 압도됐으면 나라는 존재는 정말 먼지와 같구나 싶을 정도다. 심지어 우리가 던진 모든 질문은 이미 윤 변호사님이 고민한 화두였다. 빠짐없이 본인의 결론을 제시했고, 분명 대안이 없을 것만 같은 막막한 의문에도 반드시 잠정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놀라운 경지였다. 
 

 

강의가 끝난 후, 우리는 윤 변호사님 칭찬으로 웅성거렸다.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닌 김연준 군은 그 질문이 알고 보니 매우 철학적이었다고 평했다. 과연 그랬다. ‘이 사람은 보상받을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윤 변호사님은 “무조건 보상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라고 답한 셈이기 때문이다. 인권변호사의 자질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 있다면 무엇일까. ‘사정은 딱하지만, 현행법이 이러이러해서 사실상 인정이 어려울 것 같다.’는 냉정한 사리판단? 명석함? 글쎄. 감히 짐작건대, 아마도 윤 변호사님은 ‘결심과 의지’라고 생각하실 듯하다.
 
“제가 보상받게 해드릴게요. 법이 이렇다면, 법을 바꿔서라도, 제가 꼭 받게 해드릴게요.” 
 
8 – 응답하라 2016
 
사람은 기본적으로 배우다. 그런데 캠프에 참가한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시간이 가장 부담스러웠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배우도 부끄럽긴 한가 보다. 단 세 시간 만에 대본을 쓰고 외우고 BGM에 무대배경까지 만들어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해놓고도, ‘그래도 부담스러웠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사람은 또한 겸손하기까지 하다. 
 

 

마지막 밤 펼쳐진 인권의 재구성. 모두가 참여했으니, 단연 재미있었다. 이틀을 지내면서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하기도 했는데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자기를 드러낸다. 심지어 본인이 연기한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명배우다. 연기하는 동안은 자기가 아니었던 거다. 접신. 이러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빈곤과 복지’라는 주제를 꾸민 우리 3조가, 1등의 영예를 안았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냥 여러분이 차려준 밥상에 두릅 하나.... 아닙니다. 
 
9 – 한번 사는 세상, 나는 어디에서 누구를 위해 누구와 일할 것인가
 
밤은 초월의 시간이다. 이해를 넘어선 두근거림이 찾아온다. 어찌나 못다한 이야기가 많았는지 그 밤을 꼴딱 새워 도란도란 하고는 마지막 아침을 맞았다. 잠을 자지 못한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다. 옆에서 보면 눈두덩이 ‘3’자가 되어 소라미 변호사님의 마지막 수업에 참여한다. 여기도 3, 저기도 3, 333333..... 너희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계신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의 한국염 대표가 그녀를 일컬어 ‘하얀 아기 나비’라 했다더니, 과연 하얀 마음. 강단에서 담담하게 ‘꿈’을 설파하고는, 중생들이 1년 후의 자기에게 보내는 편지를 쓸 수 있도록 인도하시네.
 
어느덧 수료식. 살면서 언제부터인가 가슴 뛰는 일이 적어진 만큼, 아쉬운 일도 별로 없었다. 지나고 나면 그뿐이지, 아쉬움이란 것도 사실 실체가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수료식도 마쳤고, 사진을 함께 찍었고,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말까지 다 들었는데도 괜히 뭉그적거리며 자리에 앉아있다. 어색하게 서로 웃어도 보고, 이미 주고받은 번호도 다시 한 번 묻기도 하고. 이렇게 가득한 연대감과 든든함은 정말로 오랜만이었거든. 어렵게 문을 나서 지하철로 향하는 걸음에 다들 아쉬움이 뚝뚝 묻어난다. “다음에 또 봐요!” 내 아쉬움의 실체들이 하나둘 자기 트랙에 돌아선다. 
 
10 – 공감에게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타고, 캠프에서 많이 들려주셨던 YB의 흰수염고래를 들어봅니다. 한번 사는 세상, 나는 어디에서 누구를 위해 누구와 일할 것인가를 늘 고민했습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그 고민도 참 치열했죠. 그 고민은 내가 사람인 동안만 허락된 것이니, 같은 사람으로서 너무 누군가를 과대 포장하거나 존경하지 않으려고 마음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안 되어서가 아니라, 그러면 실망할 수도 있으니까.

 

몇 년이 지나 만났을 때 그렇게 안 살고 있을까봐 다시 만나기 두려울 정도로 좋은, 왜 그런 사람 있잖아요? 그런데 공감에게 고마운 것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내가 그냥 막 기대해도 되는, 존경해도 되는, 그러다 막 실망해도 안 미운,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조직. 공감. 그 놀라운 분들이, 다른 길이 아니라 이 길을 택해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그리고 더 고마운 건 이렇게 좋은 친구들을 잔뜩 만나게 해주셨다는 거에요. 여기서는 진지하거나 분석적이거나 따져 묻거나 감정에 호소하거나 하는 모든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인생에서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했고, 혼자가 아니라 늘 연대하고 동료들과 어울리고 함께 싸우고 함께 울고 웃는 것이 얼마나 짠한 행복을 가져다주는가를 배우게 했습니다. 흰수염고래 멋있잖아요. 바다 깊은 데를 유유히 혼자 다니는 멋진 고래들이 많더군요. 이 고래들이 동료를 만난다면, 세상은 또 얼마나 달라질까요.
 
태생이 느리니 뒤처지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느려도 멈추지만 않으면 결국 가긴 가니까요. 다만, 도착해보니 완전 다른 곳 일까봐. 그게 두려워서 “일단 그냥 공부부터 해.”라는 말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저는 정작 필요한 나침반을 찾으려고 돌고 돌아 이곳에 왔는데. 제 나침반이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에이 사양하지 마세요. 저도 도와드릴게요. 에이 참. 넣어둬 넣어둬. 이미 일기에도 써뒀어요.
 
‘여기가 어디쯤인지 모르겠으면. 일단 나침반을 들어.’

 

글_이승준(9회 인권법캠프 참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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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영역

  • 프로필 사진
    2016.02.15 13:41

    안녕하세요, 정성스럽게 쓰신 글 정말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사실 지금 마음이 아주 쿵쾅거려서 답글 다는 일을 피하고 싶은데 무언가 더 큰 힘이 그 저항을 꺾어 이렇게 몇 자 남겨보려 합니다. 글을 읽으면서 두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쩌면 이리도 따뜻하신지.. 하며 놀라웠고 이런 시선으로 세상을 견뎌내고 있는 누군가가 있구나 하는 사실에서 그 자체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 역시 이번 겨울 많은 것을 배웠어요.. 특히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됐지요.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쩌면 그 일을 누구와 함께 하느냐라는 것일 수 있다는 것요. 소수자인 누군가에게는 이 말이 좀 더 남다른 울림으로 다가올 테고, 님과 같은 섬세한 시선을 가지신 분께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풍경들을 마주할 때마다 멈춰 서서 바라보며 살아왔는데, 아직 주변에는 그런 멈춤을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공감에는 '그런 일은 좋은 일이니 우리 함께 하자!'.. 라고 말해줄 것만 같은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승준 님 역시 그런 분이셨구요, 캠프 때 친해지지 못해 아쉬운데 비슷한 것을 뒤쫓고 좋아하니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어딘가에서 꼭 한 번 만나 뵙게 될 것 같네요. 추운 겨울 따뜻하게 보내시고 곧 시작하실 공부 좋은 성과 있길 바라며, 멋진 법조인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응원할게요, 우리 청춘 파이팅입니다 !
    • 프로필 사진
      2016.02.22 02:04
      와....정말...
      축복같은 찬사를 해주셨네요...
      너무 감사해서...
      부끄럽지만 이렇게 늦게나마
      답글 남깁니다.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저도 응원할게요!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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