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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통신] 희망버스 유죄판결에 이의 있음 - 박래군 (인권중심 사람 소장)

공감의 목소리/공감통신

by 동-감 2015.06.1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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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에서 억울한 일, 부당한 일을 당하는 인권현장으로 달려가는 희망버스라는 게 있다. 새로운 연대운동의 방식이기도 한 희망버스 운동이 시작된 건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해고자들의 투쟁을 응원하기 위해 부산으로 가는 버스가 만들어지면서부터다. 그 뒤로 송전탑에 반대하는 밀양으로, 해고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는 쌍용자동차로 달려갔고, 제주 해군기지 저지 투쟁을 하는 강정마을에 갈 때는 희망 비행기가 뜨기도 했다. 한 두 곳이 아니어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희망버스는 시민들의 일반적인 연대운동이 되었다.

 

  절망의 상황에 빠진 약자들의 투쟁을 응원하는 버스에는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승객들이 그 사안에 대해 서로 토론도 하고, 함께 하기 위한 방안들에 대해서 모색도 한다. 하룻밤을 길거리에 지새우면서 때로는 경찰과 몸싸움을 해내기도 하고 연행도 되지만, 그 사안들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그리고는 다시 연대는 넓어지게 된다. 이런 운동은 소중한 흐름이 아닐 수 없다.

 

  지난 6월 11일은 희망버스가 달리기 시작한 지 4년이 되는 날이었다. 송경동 시인의 제안으로 시작된 1차 희망버스에는 전국에서 약 7백 명이 탑승했다. 차비 3만 원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오고 가는 버스비도 부족하고, 잠자리도 길바닥일 수밖에 없는 그런 버스에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버스비를 내고 탑승했다. 희망버스는 매우 단순한 목적으로 출발했다.

 

  2011년 1월 6일 새벽, 집안의 문고리도 척척 달라붙을 정도로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던 그 새벽에 85호 크레인을 김진숙 씨가 혼자 올랐다. 단체협약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단행된 회사의 정리해고에 맞서서 싸우기 위함이었다. 김진숙 씨는 크레인 위에서 트위터로 세상에 한진의 상황을 알렸고, 아찔한 30미터 높이에서 싸우는 노전사와 세상의 사람들의 마음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개별적으로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해고자들을 응원하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그런 움직임들을 모아낸 게 희망버스였다.

 

  그 첫날 용역과 경찰이 한진으로 들어가는 문을 모두 봉쇄했을 때 공장 안에서 담 너머로 넘겨준 사다리를 타고 들어가 한진 해고자들을 만났고, 85호 트레인 밑에서 김진숙과 손을 흔들며 해후했다. 나도 탑승객의 일원으로 당시 그가 수상했던 박종철 인권상의 상패를 전달하기 위해 그 자리에 함께 했다.

 

  2차 희망버스 때는 탑승객이 열 배로 불어났다. 전국에서 그야말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버스 승객이 되었다. 경찰의 철통같은 봉쇄로 봉래 사거리에 막힌 이들은 그 거리에서 난장을 텄다. 노래하는 이들, 춤추는 이들, 토론하는 이들, 먹거리를 준비해서 나누는 이들로 북새통이었다. 밤새 비가 내려 몸은 젖고 끈적끈적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불평하는 이들이 없었다. 그날은 김진숙 씨를 직접 볼 수는 없었다. 다만 그의 스마트 폰으로 들려온 음성을 확성기를 통해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

 

  전국에서 달려온 쌍용자동차 해고자를 비롯한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장애인, 그리고 성소수자들까지 김진숙은 모두를 호명했다. 한 명 한 명 한진 해고자들의 사정을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는데, 아찔한 고공에서 흔들리는 크레인 위의 그가 불러주는 이름들, 소수자 집단의 호명일 뿐이었음에도 감동이 밀려왔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질 때 하진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떠나는 이들은 눈물범벅이 되어 서로를 끌어안았다.

 

  이런 희망버스가 5차까지 이어지고 마침내 크레인에 올라갔던 김진숙 씨는 309일 만에 크레인을 밟고 땅으로 내려왔다. 희망버스가 한 단위 사업장, 그것도 대기업 노동자의 해고 문제를 전국적인 이슈로 만들었고, 노동자가 겪는 해고를 보는 세상 사람들의 눈을 바꾸어 놓았으며, 국회에서까지 잘못된 해고문제를 질타했다. 여론에 밀린 한진 자본은 끝내 노사 간의 단체협상을 통해 해고자 복직 등의 문제에 합의했다. 그 뒤에도 여러 어려운 과정이 있었지만 해고자들은 모두 복직되었다. 절망의 끝에 몰렸던,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했던 해고자들에게 희망을 만들었던 운동이 희망버스 운동이었다.

 

  하지만 경찰과 검찰, 그리고 사법부가 볼 때는 실정법을 어기고 도로를 점거하여 미신고 집회와 행진을 한 것이고, 무단으로 한진중공업 회사 안으로 공동주거 침입을 한 것이고, 나와 같은 경우는 통장을 개설해 이런 운동이 되도록 편의를 제공한 것이므로 모두 유죄로 단죄해야 하는 불법행위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사회적 공론을 만들고, 문제를 해결했다는 그런 점은 뒷전으로 물리고, 536명을 사법처리하고, 이중에 확정이 될 경우 벌금만 2억5천여만 원을 될 상황이다. 지금 현재에도 재판에 계류 중인 사람이 64명이다.

 

  지난 6월 11일은 희망버스가 첫 시동을 건 지 4년이 되는 날이었다. 나는 희망버스를 제안했던 송경동 시인과 노동당의 정진우와 함께 피고인이 되어 부산고등법원 303호 법정에서 항소심 선고를 받았다. 나는 벌금 3백만 원, 정진우는 벌금 5백만 원으로 1심 때와 동일한 형을 선고 받았다. 이날 선고의 가장 핵심은 ‘송경동 시인이 법정구속 될 것이냐’였다. 1심에서 보석 상태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과 검찰의 항소 이유를 모두 이유 없다고 기각하면서도 다행히 송경동 시인에게 부과된 징역 2년형을 유지하면서도 집행을 3년 유예했다.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같이 버스 타고 내려갔다가 송 시인만 법정구속되어 구치소로 가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유죄 판결에 분노한다면서도 그저 그가 구속되지 않은 것만을 다행으로 여기며 웃으며 법정을 나왔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속은 상했다.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는 애써 눈감고 실정법의 조문과 판례에 안주한 판결 내용 때문이다. 사실 희망버스를 누가 제안했고, 기획하고 집행한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인가. 전체적으로 보면 약자들의 손을 잡아주고, 희망을 같이 만들었다는 것은 유죄로 단죄할 일이 아니라 권장해야 할 일이지 않은가. 애써서 회사 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검찰의 기소 이유를 그대로 다 들어주는 사법부는 역시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경찰이 이미 봉쇄해서 회사 근처에는 접근도 하지 못하도록 한 상황에서 그럼 희망버스 승객들은 속수무책으로 빈손으로 돌아서서 역시 세상은 바뀔 수 없다고 더 깊은 절망을 안고 돌아가야 했을까.

 

  역시 사법부 이미 가진 자의 충실한 종복이 되어 버린, 아니 가진 자들의 구성원으로 편입되었음을 확인했다. 그들이 해고노동자들이나 소수자들의 설움, 아픔, 통곡을 이해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법정은 치열한 투쟁의 현장이다. 거기에서 저들의 실정법과 판례를 바꾸도록 하는 일은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서울과 부산을 오르내리는 4년간의 법정투쟁에 헌신적으로 임했던 변호인들이 있어서 너무 고맙다. 그들이 사법정의의 희망이다.

 

  희망버스는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역사 속에서 그리고 연대의 인권운동사 속에서는 무죄임을 확신한다. 연대를 통한 자유와 평등의 증진과 실현을 위한 희망버스는 그래서 지금도 부르는 곳으로 달려갈지 모른다. 오늘도 누군가는 희망버스를 제안하고 기획하고, 그리고 버스에 오를 것이다.

 

글_박래군(인권중심 사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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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27 11:48
    역사의 수레바퀴는 대중에 의해 굴러가지만 수레를 운전하는 것은 소수의 앞서 깨어난 자들의 몫입니다. 응원하고 지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