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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통신] 굴뚝전상서 - 이창근과 함께 지켜야 할 약속 _ 김덕진(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공감의 목소리/공감통신

by 동-감 2015.03.16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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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근이형

  어제 ‘정리해고 없는 세상과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 전원복직을 위한 3.14 희망행동’을 준비하며 평택 굴뚝 농성장에 다녀왔어. 형은 저 높은 굴뚝위에 있었지. 형은 망원경으로 나나 다른 사람들을 보았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형을 겨우 영상통화가 연결 된 스크린으로만 보았을 뿐이니 많이 아쉬웠어. 얼굴 마주하고 구석에 가서 담배 한 대씩 나눠 피우며 실없는 농담이나 촌철살인 독설을 주고받아야 하는데 그걸 못하니 너무 아쉽더라고.

 

 

  지난 2009년 여름 나는 용산참사 현장 남일당과 다섯 철거민의 시신이 있던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 있었고 형은 옥쇄파업 중이던 평택 쌍용자동차 도장 공장 옥상에 있었지. 형이 지금 혼자 올라 있는 굴뚝 위에는 서맹섭이와 다른 두 형들이 올라있었고 말이야.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대변인 이창근은 그때부터 유명했지만 사실 나는 그때까지 형을 알지 못했어. 처음에는 민주노총에서 국제연대 담당하던 이창근형이랑 형이 같은 사람인줄 알았지.

 

  형은 물론이고 당시 지부장이었고 지금은 그 유명한 민주노총 위원장이 된 한상균형도 알지 못했지. 김정우형, 문기주형, 김수경형, 양형근형, 박정만형, 김상구형, 이남국형, 한윤수형, 정형구형, 이현준형, 김득중형, 윤충렬형, 김정운형, 이갑호형, 김남섭형, 김정욱형, 김성진형, 김남오형, 염진영형, 박주헌형, 오석천형, 김대용형, 황인석형, 박호민, 고동민, 서맹섭, 복기성, 유제선 등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은 아무도 몰랐어. 내가 소주한잔 걸치면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는 말처럼 솔직히 형들(생물학적인 나이로는 형이 아닌 분들도 있지만 그냥 형이라고 부르고 반말하기로 함)이 해고 안 당했으면 우리가 만날 수나 있었겠어. 노동절 집회 같은데서 그냥 스치고 지났겠지.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와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형들이 아니라, 셋째를 임신하고 만삭의 몸으로 공장 천막을 당당히 지키던 이정아, 그 추운 날 겨울날 주강이 손을 잡고 남일당에 형들 재판 탄원서를 받으러 왔던 이자영, 지금은 심리치유센터 와락 대표가 된 권지영 등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가족대책위원회 여성들이었어. 그 가족대책위 분들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굴뚝농성, 옥쇄파업 이런 이야기들을 하러 용산참사 남일당 현장에 자주 왔었어.

 

  가족대책위 분들의 호소를 듣고 문정현 신부님을 모시고 바로 다음날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 갔어. 가족대책위와 함께 공장 앞을 지키던 인권활동가 친구들을 만나 상황 이야기를 듣던 중 공장안의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물이랑 약품들을 전달하려고 여러 신부님들과 함께 경찰들과 실랑이를 한참 벌이는데도 경찰들은 요지부동이었어. 용역들이 신부님들한테 꺼지라면서 막 욕을 하더라고. 용산참사 남일당 현장에서도 수시로 용역들과 시비 붙으면서 별 욕을 다 먹고 있을 때였는데 똑같은 일을 평택에서도 겪으니 진짜 열이 받더라고. 그런데 그런 일들을 가족대책위 분들도 매일 겪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정말 화가 났었어.

 

  가족대책위 분들은 용산참사 남일당 분향소를 참 자주 왔었어. 올 때 마다 번번이 분향소 조의금 함에 봉투를 넣고 가서 내가 그러지 마시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어. 당시 내가 용산 범대위 재정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자주 다녀가신 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지. 그래서 나도 그만큼 평택을 자주 가야지 생각했던 것 같아. 형들도 형들이지만, ‘형수’들의 힘은 정말 대단했어. 난 살면 살수록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여러 측면에서 훨씬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어. 형들은 나중에 복직하면 가족들에게, 특히 ‘형수들’에게 참 잘해야 할 거야.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한 2009년 여름날의 경찰특공대의 충격적인 폭력진압이 있었던 날, 두 번 생각 할 것도 없이 평택으로 달려가서 만신창이가 되어 경찰들에게 끌려나오는 형들을 봤지. 물론 그때까지도 이창근이 누군지 몰랐어. 취재요청서나 보도자료에 기획부장인가 대변인가 하는 직책과 함께 적혀있는 이창근이라는 이름만 알았지. 나는 지금도 ‘016’ 번호를 쓰고 있는데 그때도 대부분 ‘010’으로 바꾸던 시절이라 형 전화번호가 ‘016’ 이어서 나랑 똑같다고 생각했던 일도 갑자기 생각난다.

 

  그 8월의 여름날, 경찰특공대 헬기소리를 잊을 수가 없어. 헬기들이 공장 위를 날고 경찰들이 테이저 건을 쏘는 장면들이 뉴스에 나왔지. 마치 어느 군종기자가 찍은 전쟁터의 사진인양, 군사독재정권의 군대가 국민을 짓밟던 5.18 광주민중항쟁 때의 장면인양, 착각하게 하는 장면들이 21세기 한국 땅에서 벌어졌다니 말이야. 그것도 용산참사로 다섯 철거민과 한명의 경찰을 죽음으로 몰고 간 폭력진압으로 온 사회가 슬퍼하고 분노한지 고작 반년이 지나서 그런 일이 다시 벌어졌다는 것을 믿을 수도, 참을 수도 없었어. 형들은 대부분 경찰서로 연행되었고 곧이어 50명이 넘는 형들이 구속되었지. 평택구치소, 안양교도소, 수원구치소 등으로 나누어 수감 된 형들의 소식을 계속 들으면서도 형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복직되지 않고 거리에서 싸울 줄은 몰랐어. 강제진압이 있었지만 여야 국회의원들까지 중재에 나서 회사 측과 합의했던 해고자 복직과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의 약속이 이렇게 헌신짝처럼 버려 질 줄은 몰랐지.

 

  2009년 겨울 나는 용산참사 유족들과 철거민들의 법적 대리인이 되어 대정부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어. 자영이 누나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난 주강이 손을 잡고 추운 겨울날 남일당 용산참사 현장에서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님들을 찾아와서 형들 재판의 탄원서를 받으러 왔던 자영이 누나를 기억해. 미디어 충청에서 발행한 77일간의 옥쇄 파업 사진집을 세권 가지고 왔었는데 한권을 들고 명동성당에 가서 당시 수배 중이었던 박래군형이랑 같이 보면서 얼마나 울었나 몰라. 그날 나와서 술 엄청 마셨다.

 

  용산참사 철거민 희생자 분들 장례도 치르고 사무실에 복귀해서 나는 다시 내 일들에 복귀했어. 다시 군 부대나 감옥에서 일어난 인권침해 사건들 따라다니다가 제주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짓겠다는 소리에 제주를 한 달에도 몇 번씩 날아다녔어.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사실 많이 잊고 살았어. 사람이 그렇잖아.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잊어가고 그러는 거잖아.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봄날, 지금은 ‘인권활동공간 활’에서 일하고 있는 기선의 전화를 받았어. 다짜고짜 사무실에 있는 향로와 향을 가지고 대한문으로 와 달라는 요청이었어. 형도 알다시피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추모제를 많이 해서 향로를 가지고 있는 거의 유일한 인권단체였거든. 기선은 그걸 알고 있었던 거지. 난 그날 그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했어. 그 전화로 나와 형들의 인연이 시작 된 것이거든. 내가 대한문에 갔을 때, 형들이 세우려던 희생자 분향소는 이미 경찰들의 침탈로 두 번 철거되고 분향 물품들을 다 압수당한 상태였어. 경찰들은 형들을 고립시키고 있었지. 난 경찰들 머리위로 봉투를 날려 기선에게 향로를 전달했고 재빨리 분향소를 차리고 형들은 절을 시작했어. 난 그때도 형들이 누군지 몰랐는데 나는 얼떨결에 경찰들과 심하게 몸싸움을 하고 다음 일정 때문에 자리를 떠났지.

 

  쌍용자동차 희생자들을 기리는 대한문 분향소가 설치되고 난 후부터 우리는 참 많은 일을 함께 했어. 분향소를 지키는 싸움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싸움이면서 곧 집회 시위의 자유를 지키는 일이 되었지. 수많은 사람들이 대한문을 찾았고 대한문은 그 이후 쫓겨나고 내몰리는 사람들의 성지가 되었어.

 

  그 해 5월 우리는 문정현 신부님이 광주인권상을 수상하시는 날 신부님의 부름을 받고 광주를 찾았지. 신부님께서는 상금을 내어 놓으실 테니, 이걸로 쌍용 강정 용산이 함께 할 수 있는 무슨 일이든 만들어보라고 하셨잖아. 쌍용(S)은 정리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탄압받는 노동자들의 상징이었고, 강정 구럼비(K)는 인간의 탐욕 앞에 파괴되는 자연과 생명의 상징이 되었으며 용산참사(Y)는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의 상징이 되었지. 그래서 우리가 모여 만든 것이 바로 SKY_ACT 스카이 공동행동이었어.

 

  정동프란치스코 회관을 가득 메우고 출범식을 했고 그 해 여름 전국순회투쟁을 떠났어. 한 여름에는 강정생명평화대행진에 합류해서 도보로 제주를 한 바퀴 돌았고 가을에는 제주 강정을 출발하는 대망의 2012 전국생명평화대행진을 시작했지. 30일간 전국에서 싸우고 있는 모든 현장을 찾겠다는 결심으로 생명평화대행진을 함께 하며 서울까지 걸었잖아. 주강이도 함께 했었던 지리산 실상사 만민공동회 때는 정말 난 이 대행진의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그때까지도 나는 순진했었어.

 

  대행진 마지막 날 기억나? 나는 여의도를 출발해서 용산참사 남일당 현장 추모집회, 국방부 앞 규탄집회마치고 서울광장을 향하던 행진대오를 잊을 수가 없어. 아침에 500명 정도로 시작했던 행진 참가자가 점점 늘어 5천여명이 서울시청광장으로 들어설 때는 스카이 공동행동을 만든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어. 물론 지금까지 그 행진으로 기소 된 재판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말야.

 

  그날 열린 문화제에서 30일째 단식 중이던 정우형이 기다시피 무대에 올라 발언을 할 때, 나는 사회를 보다가 얼마나 울었나 몰라. 우리는 그날 쌍용자동차 희생자 분향소 옆에 천막을 치고 ‘함께살자 농성촌’을 세웠어. 밀양송전탑(M) 싸움을 하던 탈핵운동 진영까지 합류하며 SKYM 농성촌이 되었고 대한문은 정말 소외되고 억울한 서민들의 유일한 숨통 같은 곳으로 자리 잡은 거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형들은 참 대단했어. 천주교신자도 아니면서 대한문 매일 미사에 꼬박꼬박 함께했고 연대하기 위해서라면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았지. 형들이 차로, 자전거로, 두다리로 누빈 거리를 다 합치면 아마 지구 한두 바퀴는 너끈히 돌지 않을까 몰라. 엊그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평택 공장 앞에 모인 것은 아마 형들이 먼저 내밀었던 그 따뜻한 손길에 대한 응답이었을지도 몰라. 물론 이창근 보러 온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말이야. 26명의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희생자들을 기억하자는 2만 6천개의 약속 자물쇠 중 하나를 내가 걸 수 있어 너무 뿌듯했어. 내 책상위에 그 자물쇠의 열쇠를 걸어두었는데 볼 때마다 생각 날 것 같아. 평택에 내 것을 무언가 남기고 왔다는 사실이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더라고.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들을 하고 있을 거야. 자물쇠 회사에서 기부금 좀 내야하지 않나 몰라.

 

 

 

  마지막으로 ‘이창근의 해고일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네. 내가 사실 학자들이나 활동가들이 그동안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서 책을 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아. 자신의 삶이나 생각을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어 놓는다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 자신의 분야에서 스스로가 만족하고 인정하는 나름의 최고의 시절을 경험하고 난 후, 돌아봄을 통해 자신을 바닥에 내려놓을 수 있을 때쯤은 되서야 책을 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물론 소설이나 시 같은 창작물이야 상관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창근의 해고일기’가 많이 팔렸으면 좋겠어. 난 원래 형의 ‘날 글’들을 좋아하니까. TV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들이 하는 말처럼, 형의 글을 읽고 있으면 형이 옆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잖아. 더불어 이 책의 인세와 수익금으로 ‘분홍 도서관’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참 좋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희생자 26명을 잊지 말자고 끈질기게 이야기하는 형의 마음이 이제 그분들의 아이들과 늙어가는 해고노동자들과 또 그 아이들이 함께 놀고 쉴 수 있는 공간인 ‘분홍 도서관’으로 완성 될 것이라고 난 믿어.

 

  지난 10일이 내 생일이었잖아. 형이 동영상도 찍어서 축하인사를 보내줬는데 다른 사람들이 질투할까 공개하지는 않았어. 나는 그동안 생일이란 날은 그저 좋은 사람들 모아 술 마시는 날 뿐이지 뭐 특별한 의미가 있나 생각했었어. 그런데 이번 생일에는 생일선물을 받고 싶다고 주변 사람들을 좀 졸라봤어. 태어나서 공개적으로 생일선물 달라고 졸라 보기는 처음이지. 바로 "이창근의 해고일기"를 사달라는 청이었어. 처음에는 10권정도 오면 정말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동민이가 목표가 너무 소박하다며 나이만큼은 받아야 성공이 아니겠냐고 하는 거야. 그래서 42권으로 목표를 삼았지. 그런데 결과가 어떤지 알아? 지금 사무실에 도착해 있는 ‘이창근의 해고일기’가 70권이 넘어. ‘인기가수’ 이정열 손병휘 형은 인터넷 구매 어렵다고 통장으로 20만원을 보내주셨지 뭐야.

 

  그런데 내가 정작 놀라고 기뻤던 것은 생각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책의 숫자만이 아냐. 누가 보내줬는지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정말 신이 났었어. 연락 없이 지낸지 수년이 지난 친구들, 학교 다닐 때는 같이 데모했었는데 지금은 직장 다니면서 아이들 건사하느라 바쁜 후배들, 심지어는 결혼해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옛 여자 친구까지 내게 생일 선물로 ‘이창근의 해고일기’를 보내 온 거야. 난 그동안 우리가 관심 있는 일들에 세상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이번은 내 생일이라서가 아니라 이창근의 해고일기 때문에 성공한 프로젝트였던 거야. 내가 후원금 15000원을 생일 선물로 보내달라고 했으면 아마 몇 명 안 보내줬을 거야.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희생자들과 해고노동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흔쾌히 내 생일 선물 보내기에 동참을 한 것이지. ‘이창근의 해고일기’ 판매부수 늘고, 오랜만에 친구들하고 연락이 이어지고, 다시 사람이 희망이라는 것을 내게 알려주었고, 내 친구들에게도 뭔가 뿌듯함을 선물 해 준 정말 눈부신 생일이었어. 내가 ‘중년의 치기어린 꿈’이라고 이름 부쳤던 생일선물 받기로 너무 행복했어. 이게 다 형 덕분이야.

 

  이 긴 편지의 마무리는 역시 형에게 하는 부탁이 될 것 같아. 많은 이들이 형한테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지만 나는 솔직히 형을 사랑까지 하는지는 모르겠어.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이 100일 가까이 그 굴뚝위에 있는 형을 걱정하지만 나는 사실 꼭 그렇지는 않아. 나는 형이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래서 난 형이 스스로를 누구보다 아낄 것이라고 생각해. 난 형이 잘 버텨 줄 것이라고 믿어.

 

 

  그리고 형은 형이 판단해서 이제 내려와도 되겠다 싶을 때 잘 내려 올 것이라고 생각해. 그날이 오늘이든, 내일이든, 난 형이 굴뚝에서 내려오는 날이 바로 우리가 승리하는 날이라고 생각해. 지금 회사와 진행되는 교섭의 내용이 무엇인지 나는 궁금하지 않아. 어떤 내용으로 교섭이 마무리 되든, 교섭이 깨지든 그건 온전히 187명의 해고자 형들이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 하니까. 나는 형들이 어떤 결정을 하던 그 결정을 존중해. 잘 합의되면 매달 월급날에 한명씩 찾아가서 맛난 거 사달라고 하면 되니 187개월 동안은 얻어먹을 수 있을 테고, 만약 7년 만에 어렵게 만들어진 교섭 테이블이 깨진다면 그동안처럼 형들하고 또 농성하고 문화제하고 행진하면 되니까 뭐.

 

  난 창근이형을 포함한 모두가 행복하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결과물을 잘 만들어내기를 바래. 그래서 형이 내려오고 나면 형의 그 빛나는 아이디어들과 빼어난 추진력으로 같이 해보고 싶은 일들이 많으니까. 지난 해 대법원에서 쌍용자동차의 정리해고가 정당했다는 어이없는 판결을 내린 날, 우리가 용산참사 유가족 어머니 가게에 가서 밤새 술 마시며 한 이야기들을 기억할거야.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복직은 이제 187명의 해고자들과 그 가족들만의 일이 아니야. 우리도 살면서 가끔 기쁘고 좋은 일도 좀 있어야 살맛이 날거 아니냐고 했잖아. 얼른 내려와서 공장가서 차 만들어야지. 형들이 들어가서 만드는 차 사려고 내가 지금 18년 동안 32만 킬로미터를 달린 시가 50만원 짜리 차를 아직도 타고 있잖아. 형 제발. 아프지마. 몸도 마음도. 그리고 외로우면 외롭다고 하고 울고 싶으면 울어. 형이 혼자 다 짊어지고 가야는 것은 아니니까. 나누고 함께 하려고 그동안 그리 “함께 살자”를 외친 거 아니겠어. 공장 벽에 걸어 둔 내 자물쇠 잘 있나 확인하러 조만간 또 갈게. 그동안 잘 지내.

 

글_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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