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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간 나는 부스스한 머리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 연속으로 꾸는 개꿈에 짜증을 내며 여느 아침처럼 관성적으로 컴퓨터 전원을 올렸다. 그런데, ‘여느 아침’이 아니었다. 인터넷은 온통 난리였다. 처음에는, ‘그냥 어제 또 큰 시위 있고, 거기다가 또 물대포 쐈나 보구나.’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살수는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아니었다. 건물 맨 위에서 불타는 망루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돌고 있었고, 나는 컴퓨터 앞에서 그대로 ‘얼어서’ 계속 그 영상을 보고 또 보았다. 다시 한 번 떠올려도, 그날은 분명 ‘여느 아침’이 아니었다. 

 나와 용산의 첫 만남이었다.

 시험 준비를 한다는 핑계가 있었기에, 나는 그들과 연대하지 않음을 정당화할 훌륭한 근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잘 되면 그 때 이런 세상을 바꾸면 되지! 분명 슬픈 일이었고, 여러 감정이 울컥했지만, 이내 넘쳐나는 수험서들 앞에서 담담해졌다. 용산에 대해 하는 것이라고는, 끼니를 때운 뒤 사람들과 삼삼오오 모여 용산을 떠올리며 자그마한 분노를 표출하는 일이었고, 그리고 그런 우리 스스로를 다시 정당화하는 일이었다.

이것이 ‘첫째 번 만남’에 내가 대처하는 방식이었다.

 
네 달여 뒤, 학교에 전국철거민연합회에서 연대 장터를 꾸렸다. 질릴 만한 공부량에 눌려, 아픈 사람들과 연대하지 않음에 무감 해지고 있던 때였고, 여러 장식적 어구로 치장된 헌법을 배우며 ‘생각보다 놀랍구나!’라고 느끼던 때였다. 헌법 책을 들고 말없이 도서관으로 향하던 그 때, 나는 그들이 장터 앞 길목에 전시해 둔 용산의 모습을 보았다. 화마가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있었고, 유족들이 절규하고 있었고, 그들 앞에 무표정한 공권력이 굳건하게 서 있었다. 모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갖고,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갖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놀라운 일’은 책 안에 있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보고 또 보았다.

둘째 번 만남이었다.


 장터에서 술을 마시며, 연대하지 않는 우리들이 연대를 위한 민중가요들을 불렀다. 그러한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낄 때 즈음, 그분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우리가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 분들을 위해 계속 민중가요를 불렀다. “동지들아, 몰아쳐 가자, 끝이 보일수록 처음처럼...” 아직 ‘처음’도 채 시작하지 않은 우리들이 그 노래를 불렀다. 다시 머리를 든 죄책감은 발걸음을 그에게 이끌었다. 연대하지 못함에 죄송하다, 아니, 연대하지 ‘않음’에 죄송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예상과 달리, 그분들은 손을 잡으며 말했다. 괜찮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지금 그 마음만 잊지 말아 달라. 우리가 있음을 잊지 말아 달라. 나는 위로를 드려야 하는 분들에게 오히려 위로를 받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둘째 번 만남’에 대처한 방식이었다.


3년여가 지난날,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을 마주했다. 다시 한 번, 물대포가 쏟아지고, 컨테이너가 도착하고, 전경과 철거민이 뒤섞이고, 망루가 타오르며, 유족이 울부짖고, 굳건한 공권력은 여전히 굳게 서 있다. 생생한 채증 영상들은, 인터넷 중계 영상들은, 언론들의 뉴스 영상들은, 공판정 속 증인들의 목소리들은, 유족들의 목소리들은 사람들을 다시 ‘그날’로 말없이 데려갔다. 머릿속에서 ‘첫째 번 만남’과 ‘둘째 번 만남’이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어느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2009년 그날에 와 있었다. 아니, 그날 아침, 컴퓨터 앞이 아닌, ‘용산’에 와 있었다. 다시 한 번 그날의 감정들이, 하지만 지난 시간에 의해 빛바래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다시 한 번 죄책감이 들었고, 다시 한 번 아팠으며, 다시 한 번 답답했고, 다시 한 번 분노했다. 시사회 내내 사방에서 한탄이 터져 나온다. ‘그날’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장비로 큰 나무판자 한 장만 머리에 지고, 손에는 소화기만을 든 채 현장에 진입하는 ‘경찰’들이 보였다는 점이다. 그날 ‘작전’ 중 부상을 당한 이는 두려웠다고, 무서웠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경찰 중 한 명은 공판정에서, ‘다 죽어.’라는 한 철거민의 말이 어떻게 들렸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이러다가 우리 모두 죽게 생겼어.’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고 답했다. 왜 초기 진술에서 ‘우리 모두 죽어버리자.’라는 식으로 들렸다고 진술했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그는 ‘두려움’과 ‘적개심’에 그렇게 진술했다고 답했다. 평범한 날이 될 수 있었던 어느 날 아침, 그들은 소위 ‘윗선’의 지시에 따라서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적개심을 가질 이유 없는 이들에게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일 때문에 아파하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들에 대해 미묘한 감정이 들 때쯤, 시민으로 구성된 진상규명위원회의 한 위원이 스크린에 등장하여 말했다. ‘그들도 보듬고 나가야 할 사람들이 아니겠느냐.’는 이야기. 그리고 한 경찰이 진술서를 통해 말했다. ‘철거민도 경찰도 모두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라는 이야기. 비록 그날 ‘다른 편’에 서 있었지만, 그들도, 무서웠던 그들도, 아팠던 그들도 모두 인간에 대한 몰이해가 팽배한 분위기, 그 분위기 아래에서 계산기를 끝없이 두드리며 탐욕을 숨기려 하지 않는 자본가와 자본, 그 아래에서 기생하며 정권과 체제의 안정만을 따졌던 국가 권력, 그 권력 아래에서 그저 순응하기에 바빴던 ‘우리’ 등이 마구 뒤섞인 시대가 낳은 이들이었다.


용산과의 ‘셋째 번 만남’이었다.

시사회가 끝나고, 장내엔 침묵만이 흘렀다. 다른 시사회와 달리, 박수도, 웃음도 없었다. 영화에 대해서 의견을 이야기한 한 분은 “이 영화를 어떻게 돈 주고 보라고 하란 말이에요.”라고 이야기했다. ‘보기가 힘들었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 아파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공유했다. 시사회의 한 분의 말씀처럼, 어떤 일을 잊는 것은 그것이 해결된 뒤에야 비로소 시작하는 것일 테니까. 잊지 말아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80년 광주”라는 말을 누군가가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전국체전의 개최 예정지였던, 당시 도청 소재지였던 ‘도시 광주’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용산’이라는 단어는 이제 ‘80년 광주’와 같은 의미의 단어가 되었다. 떠난 자의 한, 떠나보낸 사람의 투쟁, 그들과 함께 손을 잡은 이들의 연대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모든 사법적 평가가 끝나고, 굳건한 공권력은 여전히 굳건한 공권력을 확인받은 오늘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많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용산’을 단순히 지명을 나타내는 고유명사만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라는 것, 이것은 실로 자명하다. 그 아픔을, 그 안타까움을 나 스스로 잊지 말고, 용산을 기억하는 일. 그리고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도록,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일을 해 나가는 것.


이것이 지금 내가 ‘셋째 번 만남’에 대처하고 있는 방식이다.
                                                                                                                         

글_ 김구열(15기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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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프로필사진 이상효 글 잘쓰셨네요. 연대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부끄러움을 주는 글이고요.^^; 2012.03.22 07:5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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