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뜻밖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내 예상대로라면 그날 오후 토론회장 앞에서는 혐오 세력들이 배수진을 치고 행사 진행을 방해하고 있어야만 했다. ‘동성애 결사반대’ 를 외치며 절규하는 사람들, 부채춤을 추면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사람들. 서울시 인권헌장 제정 사태부터 시작해 퀴어퍼레이드에 이르기까지 최근 몇 년간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반대편에 서서 혐오 표현을 일삼던 바로 그 사람들. 그 사람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11월 10일 저녁 프레지던트호텔 31층 슈벨트홀에서 진행된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 결과발표 토론회’는 문자 그대로 혐오 세력의 청정 구역이었다. 토론회가 호텔 실내에서 진행돼 난입하기가 힘들었던 것인지, 행사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아 행사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에서도 토론회는 순조롭게 시작됐다. ‘우리는 안전하다’는 느낌과 함께.

 

차별과 폭력보다 무서운 비(非)가시성


 지난 2014년, 국가인권위원회는 한국사회에서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의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실태조사>를 진행했다. 공공 영역에서의 차별 실태, 그중에서도 교육 및 고용 영역에서의 차별 실태를 다룬 뒤 이에 대한 적절한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업이었다. 조사 대상은 청소년/성인 성적 소수자 도합 1,000여 명, 청소년 성적 소수자의 주변인 교사 100명이었다. 결과 발표는 총 네 파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학교 내 차별실태 ▲고용영역에서의 차별실태 ▲트랜스젠더 차별실태 ▲해외 법·제도 및 정책제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관심이 갔던 것은 교육 영역에서의 차별 실태였다. 중고등학교의 경우 대다수의 사람이 거쳐 가는 곳이고, 그만큼 사회적 파급력이 큰 공간이기 때문이다. 발표 내용을 정리해 보면 학교 내에서의 괴롭힘과 제도화된 차별이 심각한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보호 정책은 부재했다. 상당수의 성적 소수자 청소년은 자신이 성적 소수자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이반 검열’과 같은 적극적 차별 정책을 경험했고, 이 중 19.4%의 성적 소수자 학생들은 자살 시도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학교는 은신처가 될 수 없었다. 80%에 가까운 성적 소수자 학생들은 학교에서의 차별 및 괴롭힘 경험을 교사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라고 응답했기 때문이다. 이는 교사 및 제도에 대한 불신을 보여주는 지표로, 실제로 조사 과정에서 상당수의 교사들은 성적 소수자 학생을 존중과 보호 차원이 아닌 ‘문제 학생 지도’라는 관점에서 인식하고 있었다.

 


고용 영역에서의 차별 실태는 언뜻 봤을 때는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조사 결과 성적 소수자가 고용되어 있는 직장 유형의 분포가 전체 임금 근로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실제로 다양한 직종에서 일하고 있음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성소수자인 직장 동료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괴리는 어디서 온 것일까? 정답은 대다수의 성적 소수자들이 커밍아웃을 하지 않고 직장 생활을 한다는 데에 있었다.


“차별이나 괴롭힘의 경험은 특별히 없습니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경험이 없을 수 있겠죠.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이럴 때 와 닿기도 합니다. 만약 나의 성향이 알려진다면 직장에서 해고당할 확률이 100%일 것이며 취급조차 받지 못할 것입니다.” (토론회 자료집 중)


설문 결과 동성애/양성애자 응답자의 약 70%는 직장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지 않고 근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겪는 차별 역시 성적 소수자 자체에 대한 직접적 차별이기보다는 성별 표현(겉으로 보이는 외모, 행동, 말투 등)이나 법적으로 비혼인 상태로 인한 차별 경험이 대부분이었다.


요컨대 한국 사회에서 성적 소수자가 가지는 사회적 위치는 ‘비(非)가시성’이라는 단어로 일축할 수 있다. ‘소수자’라기보다는 ‘없는 사람’에 가까운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차별 경험에 대한 연구에서도 나타났다. 2004년 한국노동패널데이터에서 전국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차별의 원인은 ‘성별/교육/연령/장애/출생지역’이 제시되었을 뿐 성적지향/성별 정체성은 설문 항목에서 아예 고려조차 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최근 교육부가 제시한 성교육 표준안과 여성가족부의 양성평등 기본법에서 ‘성소수자’라는 표현이 삭제되는 등 성소수자는 사회적으로 없는 사람이거나 없어져야 할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성소수자라는 글자를 지워버린다고 해서,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한 사람이 가진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성소수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나 자신으로서 살아갈 권리

 

내가 나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일견 쉬운 일로 보인다. 아침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는 것, 직장에 출근해 일하고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일상이다. 그런데 이 보잘것없는 일상이 순조롭게 흘러가기 위해서는 자유와 평등,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흑인들이 백인들과 같은 버스를 탈 수 없고 여성들이 직장 활동을 할 수 없는 시절도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일상적 활동들 역시 정치적 투쟁의 산물일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성적 소수자들에게 생활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활동들은 억압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우리의 삶을 이루는 대부분의 영역들은 성별이분법과 이성애중심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틀에 맞지 않는 성적 소수자는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성소수자’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흔히 떠올리는 것은 동성혼 합법화 논쟁, 주민등록상의 성별 변경 같은 제도적인 문제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수면 위로 떠오른 쟁점들일 뿐 성소수자들이 실제로 겪는 차별은 생활 전반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남자친구/여자친구는 있냐?’는 질문, 게이 드립, 공중 화장실의 남/녀 구분 표시 등 성적 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상정하지 않고 있는 일상적 환경 속에서 성적 소수자들의 삶은 끊임없는 자기 검열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된 김보미 씨는 커밍아웃 과정에서 “(그동안)친구들과 함께 하면서 저는 완전히 ‘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성소수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저는 제 얼굴을 가질 수 없다.”라는 말로 이러한 억압적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을 숨기는 일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극적 행위가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끊임없이 표현하고 모방해야 하는 적극적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성적 소수자들은 단순히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시스젠더-이성애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 이들은 동성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애인이 있는데도 싱글 행세를 하거나 가상의 이성 친구를 만들어내야 한다. 스스로가 여성이라고 느끼는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의 경우 자신이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화장을 하고 머리를 기르려는 욕구를 ‘매일매일’ 억누르면서 사람들에게 남자다운 외모와 언행을 보여주어야 한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으면서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하는 것, 가짜 이름을 달고 가짜 얼굴로 살아가야 하는 것. 이것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감내해야 하는 또 다른 종류의 폭력이다.

 

성소수자를 지지한다는 말의 의미


시스젠더-이성애자인 나의 입장에서 성소수자 인권 문제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성소수자인 친구들의 얼굴이다. ‘나 사실 양성애자야’라고 고백하던 얼굴, 퀴어퍼레이드에서 우연히 만나 놀라던 얼굴, 설문조사 성별 체크란을 공백으로 비워두며 인상을 쓰던 얼굴. 그 친구들 역시 내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일상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또 성소수자가 지구를 멸망시키기라도 할 것처럼 혐오 표현을 내뱉는 세력들을 생각한다면, 답답한 마음에라도 내가 앞장서서 ‘그건 아니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여기에는 어떠한 진영 논리도 없고 어려운 개념이나 거대 담론이 끼어들 자리도 없다. 기껏해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나에게 있어 성소수자를 지지한다는 말은 내 곁에서 살아 움직이는 구체적 인간들, 그 사람들이 영위하고자 하는 평범한 삶의 양식을 지지한다는 말로 대체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성소수자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실체를 가진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소수자가 ‘변태적 성욕에 빠진 타락한 존재들’이 아니라 시스젠더-이성애자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디어, 학교, 직장 등의 공적 영역에서 더 많은 성소수자들이 커밍아웃 할 수 있어야 하고, 사람들에게 성소수자인 친구들이 더 많이 생겨야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커밍아웃은 성소수자가 스스로를 적극적 폭력에 노출시키는 경험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성소수자 인권 단체에서 활동하는 많은 수의 성소수자들이 신상 노출의 위험 때문에 가명을 사용하고 있고, 자보 하나를 부착할 때에도 훼손 및 테러의 위협에 놓이곤 한다. 따라서 커밍아웃보다 중요한 것은 커밍아웃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도록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며, 이를 위해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시스젠더-이성애자들의 적극적 지지 의사 표현 및 연대 활동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성소수자를 만나는 그날까지”

 

그렇다면 시스젠더-이성애자들의 지지와 연대 활동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을까. 토론회의 해외 법·제도 및 정책제언 파트에서 소개된 ‘Purple My School’이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Purple My School’은 유엔(UN)에서 주관하고 있는 사회 운동으로,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학교 구성원들이 보라색 아이템을 착용하고 SNS에 사진을 업로드하는 캠페인이다. 이 캠페인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학교 내에서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으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거나 고립감을 느끼지 않는 것, 궁극적으로는 성소수자 친화적인 교육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캠페인의 특성상 성소수자가 직접 커밍아웃을 할 필요가 없고, 누구나 불특정 다수에게 지지 의사를 밝힐 수 있다는 점에서 모두에게 안전한 연대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6월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출범한 공감 GSA(Gay-Straigt Alliance), ‘공감 Bridge’ 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탄생했다. GSA는 성소수자에게 안전하고 포용적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 성소수자와 시스젠더-이성애자가 함께하는 공동체 기반 조직이다. 공감GSA의 경우 공동체 내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성소수자 혐오 발언이나 이성애중심적 표현 등을 금지하는 것, 성소수자 친화적인 새로운 공동체 문화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 친화 활동의 영역을 개척하는 것, 구성원 개인이 아닌 공동체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제도적 측면을 개선하는 것을 활동 내용으로 한다. GSA는 성소수자들에게 차별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안전 지대를 만들어 주고, 시스젠더-이성애자들이 성소수자에 대한 인권 감수성을 키워 나가게 해준다는 점에서 모두에게 이로운 연대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감 Bridge의 모토는 “모든 사람이 성소수자를 만나는 그날까지”이다.


그러니까 내가 꿈꾸는 사회는 이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성소수자’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주변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사회.  물론 동성애 반대 집회에서 “동성애 OUT”이라는 피켓을 든 사람들을 떠올리면 좌절감이 생기지만, 벽장 밖으로 나온 성소수자들이 겉잡을 수 없이 많아지게 된다면 혐오 세력들마저도 결국 인정하게 되지 않을까. 자신들이 혐오하는 대상이 사실은 뿔 달린 외계인 같은 것이 아니라 주변의 친구이자 가족이자 이웃이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시스젠더-이성애자인 내가 해야 할 일 역시 자명해진다. 누구보다도 큰 소리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외치고,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얼굴로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하고, 누군가 게이 드립을 칠 때면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화를 내는 것. 벽장 속 성소수자들까지 다 들을 수 있도록, 그래서 더 많은 성소수자 ‘친구’들이 생길 수 있도록 말이다.

 

글_민수지(공감 22기 자원활동가)

신고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