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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 날 마주한 것은 그분과 나 사이의 거리였다. 그 거리는 온전히 내가 가진 편견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고, 그분을 밀어내며 그 날 꿈꾸었던 나의 모습으로부터도 멀어졌다.

 

자원활동가 면접을 마치고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채 사무실을 나왔다. 면접을 방금 마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찾아갈 후회와 나에 대한 실망과 약간의 민망함과 함께 창덕궁 옆을 걸어 내려왔다. 나와는 달리 너무나 말을 잘하던 옆 사람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고, 아까는 입에서만 맴돌던 말들을 이제야 입 밖으로 쏟아낸다. 이대로 지하철에 탈 수는 없으니, 아까 하지 못했던 대답들을 웅얼거리며 창덕궁 돌담을 따라 걸었다.

 

창덕궁을 지나 걷다 보니 작은 공터가 나왔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공터를 한 바퀴 도는데 구석에 노숙인 한 분이 계셨다. 그분 앞을 지나 그분을 등지고 걷는데 순간 겁이 났다. 길에서 조금 들어와 있는 공터, 아무런 목격자 없이 둘만 있는 상황, 저 사람이 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겁이 났다.

 

그러다 부끄러워졌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보게 된 것이다.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인권법재단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면접에서 내가 살아왔던 삶과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활동과의 접점에 대해 늘어놓고 나온 내가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은 사람을 노숙한다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했다. 내 마음대로 그분께 딱지를 붙였다. 그 딱지가 내 편견인지,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인지에 대한 일말의 의심도 없이. 부끄러운 마음에 도망치듯 공터를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면접 날 공감이 내게 던져준 과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라는 것이 아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신을 스스로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공감은 그때부터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내 안에 숨어 있는 그 '거리'들을 바라보라 말하고 있었다.

 

1

4월 16일, 나의 일기

 

대통령은 도망치듯 자리를 비웠고, 정부는 공허한 구호로 가득한 국민안전다짐대회를 열었다. 다시 한 번 모습을 감춘 국가를 대신해 추모제에 모인 6만의 시민을 1만의 경찰이 에워쌌고, 손에 든 꽃을 헌화하기 위해 광화문 광장으로 가던 우리는 끝도 없는 차벽과 마주했다. 경찰버스는 청계천을 경계로 해서 위와 아래를 완전히 분리했고, 차벽이 막을 수 없는 계단과 엘리베이터는 경찰력으로 완전히 막아버렸다. 결국, 나는 꽃을 든 채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광화문 광장을 찍은 사진을 봤다. 광화문 광장 역시 차벽으로 완전히 막혀 있었다. 그곳으로 건너갈 수도, 차벽 뒤에 무엇이 있는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완전히 분리된 공간. 그곳은 마치 바닷속 같았다.

 

돈과 속도와 무능과 탐욕에 가족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몇 시간 동안 단 몇 미터의 땅을 내어주지 않아 그곳을 바다로 만들었다. 그 앞에서 몇 시간의 불편함, 1년 동안 잠깐씩 당신을 스쳐 지나갔을 뿐인 것들에 대한 지겨움을 말할 수 있는가

 

"살려주세요!" 추모제에서 유가족들이 한 그 말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사진 속 분향소는 건너갈 수 없는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유가족 몇 명이 연행되었다고 한다. "손을 잡아주세요." 바다로 들어갈 용기가 없는 나는 너무나도 쉽게 밖으로 걸어 나왔다. 내 손에는 내려놓지 못한 꽃만이 쥐어져 있었다.

 

2

6월 28일, 다시 시청 광장이다. 이번에도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축제 현장이 아닌 그곳을 둘러싸고 있는 경찰이 세운 벽이었다. 세상과 분리시키고, 세상으로부터 벽 너머의 존재를 지워버리려 하는 그 벽, 이번엔 그 벽 너머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였고, 그들이 지우려고 하는 것은 우리였다.

 

하지만 그 벽 너머에는 지워지지 않은, 지워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같은 성을 향한다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사랑을 지울 수 없다는 듯 키스하고, 손잡고, 포옹하는 사람들.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몸을, 끼를 드러내며 자신은 절대 지워지지 않을 거라 외치는 사람들. 그곳에서는 모두가 자신들의 모습 그대로였고, 공감도 그랬다. 그날의 우리는 성적 지향이, 성정체성이 어떠하든, 그것을 밝히든 밝히지 않던 모두 그대로 아름다웠고, 지워지지 않을 기억을 만들었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믿음을 혐오에 헌납한 사람들. 자신이 믿는 신의 목소리를 저주로 채우는 사람들. 우리 바로 옆에 있지만, 전혀 다른 시대,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과 우리와의 거리는 너무나 아득했고, 그 거리는 루퍼트 미국 대사의 피습 소식에 쾌유를 기원하며 부채춤을 췄던 사람들이 퀴어 축제 반대를 위해 다시 부채를 펴다 퀴어 축제에 참가한 루퍼트 대사를 보고 느꼈을 그 거리감 같은 것이라 웃음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그들의 혐오는 그 날 시청 광장을 넘어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19.8%. 성적지향, 성정체성에 대한 차별 실태 조사에 참가한 학생 중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다. 아이들은 보고서에 적힌 숫자 너머로 이야기한다.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살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젠더퀴어, 양성애자, 18세)
제발... 차별받기 싫고 인정받고 싶어요. (남성, 게이, 17세)
차별받는 사회가 변화할 수 있도록 저도 노력할 테니 많이 도와주세요. (남성, 게이, 18세)
성적 소수자에게 인권을 주세요. 자유를 주세요. (FTM, 양성애자, 17세)
우리가 그들과의 거리를 좁혀야만 하는 이유를 아이들이 말하고 있다.

 

3

일하고 있던 샌드위치 가게로 한 여성이 들어왔다. 원하는 메뉴를 묻자 낮은 중얼거림과 함께 손짓으로 메뉴판을 가리킨다. 외국인이라는 생각에 영어로 응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건넨 영어에도 여전히 손짓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순간 외국인이 아니라 말을 못하는 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말을 소리 내어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너무나도 쉽게 외국인일 거라 생각했고,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나는 전혀 수화를 할 줄 모른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어진 나는 조용히 손님이 원하는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손님은 계산대에서 ‘현금영수증’이라는 메모를 보여주었다.

 

손님이 떠난 후 미등록 이주 아동 포럼에서 만난 필리핀 이주 노동자 한 분이 떠올랐다. 로슬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세 아이의 엄마인 그녀는 곧 한국에서 강제추방 당할 예정이었다. 그녀가 마이크를 잡고 지난 십여 년의 한국 생활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능숙하지 않은 한국말로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녀는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다 이내 울기 시작했다. 울음이 섞인 그녀의 한국말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말보다 더 많은 것이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둘째 딸에게 ‘장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울먹이는 그녀 대신 그녀를 도와주는 활동가가 말해주었다. 한때 장미 농장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딸 이름을 ‘장미’라고 지어줬다고 한다. 엄마가 일요일도 쉬지 못하고 키웠던 꽃을 이름으로 가진,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한국말이 필리핀말보다 편한 그 아이는 엄마가 단속에 걸려 필리핀으로 함께 쫓겨나게 되었다. 한마디 해줄 수 있겠느냐는 말에 장미는 책상에 고개를 파묻었다.

 

포럼에 참가한 소라미 변호사는 정부가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에 의하면 아동의 건강한 발달과 권리를 보장하는 것에는 무차별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이야기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아이들은 부모의 본국으로 송환되면 대부분 그곳에서 적응에 실패한다는 이야기, 그곳 말을 할 줄 몰라 그곳 사람들과는 의사소통마저 힘들다는 이야기, 부모가 불법체류 신분이라고 해서 아이마저 강제로 송환시킨다면 그 아이가 제대로 성장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그 아이를 대신해서 해주셨다.

 

그러나 결국 장미는 필리핀으로 보내졌다. 장미 친구들은 많이 울었다고 한다. 이제 장미와 친구들 사이에는 2,613km라는 거리와 1시간이라는 시차가 놓여 있다. 하지만 그날 나는 희망을 보았다. 로슬린씨는 임금체납을 이야기하며 울음을 터트렸지만, 그 옆에는 눈물을 닦아주고, 그녀의 이야기를 대신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언어를 권력의 도구가 아닌 권력에 의해 밀려나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려는 사람들, 언어가 권력이 되는 상황을 무너뜨리려는 사람들을 그곳에서 봤다. 희망은 그 사람들 안에 있었다.

 

4

이것들이 공감과 함께하며 마주친 ‘거리’들이다. 때로 그 거리들은 내 편견이 만들어낸 것이기도 했고, 그 거리 앞에 안전한 나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고, 밀려나는 우리를 잡아주는 공감에 감사하기도 했다.
공감은 거주형태, 성적 지향, 장애, 이주를 이유로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 앞에 놓인 그들과 사회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하는 곳이다. 그 거리를 좁혀 보는 게 어떻겠냐고 설득하고, 좁혀야만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때로는 여기 틈이 나 있다고, 그렇게 그들을 밀어내다 보면 떨어지는 건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될 거라고 이야기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5개월 동안 활동했다. 그곳에서 장미 엄마를 만나고, 현역 입영 처분을 받은 트랜스젠더분을 만났다. 공장식 축산 반대를 외치며 우리에 들어가는 퍼포먼스를 했던 동물권 활동가를 만나고, 4.16 세월호 집회 주도 혐의로 구속된 활동가를 만났다.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를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는 장서연 변호사님을 만났고, 울먹이는 장미 엄마의 입이 되어주는 소라미 변호사님을 봤고, 사건이 아닌 사람을 우선해야 한다는 황필규 변호사님의 말을 들었다. 각자 맡은 분야에서 때로는 밤을 새우며 최선을 다한 스무 명의 사람들과 함께했다. 그곳에서 각자가 반짝거리며 만들었던 순간들을 기억하고, 무엇보다도 그 첫날의 부끄러움을 잊지 않겠다.

 

“어쩌면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거였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 아닐까 싶었다.”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에서 김애란 작가가 한 말이다. 앞으로도 나는 나의 무지와 편견이 만들어낸 딱지, 거리들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공감에서 만난 사람들, 그곳에서 함께했던 순간들은 어서 그 거리를 좁히라 말할 것이다. 힘에 부치면 공감에서 보낸 5개월 동안의 기억을 펼쳐 보자. 공감과 처음 만났던 날 공감은 내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과제를 던져 주었지만, 동시에 공감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 역시 알려주었다. 앞으로도 계속 공감이 보여준 길을 따라 걸어가고 싶다. 걷다 보면 공감을, 함께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될 테니 외롭지 않을 것이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자. 그리고 함께 걸어가자.
 
                                                            

글_이무열(21기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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